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혜이 Oct 24. 2022

무질서 속의 질서

[30/100] 도전 : 1일 1글쓰기 - 프로젝트 '좋아해'

여행을 갈 때 ‘아침에 눈 떠지면 일어나 동네 한 바퀴 산책하고 근처 맛집에 간다’든가 ‘시간이 되면 유명하다는 거기 어디 좀 가볼까’하는 식의 스케줄을 짜는 사람. 그게 바로 나다. 심지어 비가 오면 당당하게 우천 시 취소를 해버리는 MBTI에서 말하는 극 P형 인간. 인생이 뭐 계획대로 될쏘냐. 현실에 맞춰 그때그때 계획을 수립해 나가면 되지! 이렇기에 당연히 일상에서도 계획을 세워본 일이 손에 꼽히지만, 이런 나에게도 몇 가지 루틴이 있다.


오래된 루틴 첫 번째는 아침에 일어나서 침구 정리하기. 엄마품에 있을 때는 해라 해라 해도 절대 안 되더니 자취를 시작하고 저절로 침구를 정리하게 됐다. 성공의 법칙으로 아침 성취를 위해 시작했다 뭐 그런 건 아니고(심지어 이 루틴을 시작했을 땐 몰랐다), 일주일에 며칠은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거나 집에서 잠만 자고 나가던 막내 시절 깨끗하게 정돈된 침대를 보면 어쩐지 안정이 됐다. 치열하게 일하고 와서 깨끗하게 씻고, 단정한 침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당시 내게 몇 안 되는 힐링 포인트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정리해주던 침대가 그리웠을까.


두 번째는 매일 샤워 후 스퀴지로 벽과 바닥 물기 제거하기다. 코로나로 재택근무가 시작됐을 무렵, 집안 정돈에 에너지를 쏟을 때 만들었다. 물기를 삭삭 긁어 하수구로 밀어 넣는 일은 30초밖에 걸리지 않는데 묘한 쾌감이 있고, 머리카락을 치우기도 좋다. 무엇보다 이렇게 하면 바닥이 금세 말라 반건조 욕실로 사용할 수 있는데, 바닥 청소 주기가 확 늘어난다. 덕분에 핑크 물때를 안 본 지 오래다.


세 번째 루틴은 매일 아침 커튼과 창문을 활짝 여는 일! 겨울에도 잠깐이라도 열면 밤새 건조했던 코가 뻥 뚫리는 느낌이 들고, 정신이 맑아진다. 분위기 환기하기에는 딱! 네 번째는 현관에 신발을 쌓아두지 않는 것인데, 고양이들이 자꾸 현관엘 내려가 치우기 시작한 게 저절로 루틴으로 만들어졌다.


최근에는 밥 먹고 바로 설거지 하기를 루틴으로 만드려고 노력 중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살림이 설거지고, 식후 바로 설거지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독한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바. 설거지 루틴은 그야말로 챌린지와 다름없다. 조금 강제성을 부여하기 위해 늘 그릇이 쌓여 있던 식기 건조대를 정리해 싱크대 하부장에 넣어버렸다. 대신 소창으로 행주를 만들어 간이 건조 공간을 만들고, 설거지가 끝나는 동시에 마른행주로 그릇을 닦아 넣으려고 노력 중이다.


굳이 루틴을 만들려고 하는 이유는 나의 싫은 점을 고치고 싶기도 해서지만, 은근 이런 걸 클리어하는 데 승부욕이 있는 모양인지, 하기 전부터 시작해서 거의 다 할 때까지도 계속 하기 싫다고 중얼거리지만, 결국 깨끗해진 개수대와 싱크대를 보면 괜히 뿌듯하다. 질서 없이 사는 내 일상 곳곳에 자리 잡은 작은 루틴들이 날 중심 잡게 하고 불안을 덜어준다. 계획이라기에도 소소한 To do list 마저 못 끝냈을지언정, 오늘 하루도 내 페이스에 맞게 잘 흘러갔다는 느낌이 든달까. 나는 영원히 J형 인간은 못 되겠지만 일상의 루틴을 차근히 늘려갈 생각이다. 흔들림 없이 올곧은 인생을 위해.



작가의 이전글 노는 게 제일 좋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