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1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다산책방.
꺼져가는 등불같은 위태로운 조선땅에 시간만이 유유히 흘러간다. 아이들은 처녀 총각이 되고, 젊은이들은 중년이 되어 간다.
1부 4권에서는 박경리 작가가 소설 속 평사리 사람들이 살아내야 했던 시간, 그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를 직접 그의 목소리로 들을 수 있다.
“지금 동방의 작은 등불 같은 조선의 백성들은 동트는 하늘을 바라보기 위해 새벽잠을 깨고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온 것은 아니다. 무거운 오수(午睡)에서 눈을 뜬 혼미한 얼굴이며 한밤중 뇌성벽력에 잠이 깬 경악의 얼굴이며 주야를 헤아리지 못하고 어디까지 왔는가를 알지도 못하며 밀려오고 밀려가는 개명(開明)의 물결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꽤 여러 해 동안을.
중국의 정신문화, 그 속에서도 유교를, 유교 중에서도 철학과 인륜 도덕의 정주학을 숭상하였던 이조 오백년 동안 그 이지적이며 귀족적인 사상을 골육으로 한 절도 높은 선비들과 왕실에 밀착된 명문거족들은 기존의 정신적 가치를 옹호하며 또는 외향적 기득권을 주장하며 지금도 수구를 고집하고 있거니와 그것은 참으로 부수기 어려운 거대하고 준엄한 조선의 산맥 그 자체는 아니었는지..
식자들뿐만 아니라 서민들이 즐겨 쓰는 도리라는 말이 있는데 자식된 도리, 부모된 도리, 사람의 도리, 형제의 도리, 친구의 도리, 백성의 도리, 이 도리야말로 생활의 규범이다. 천재를 제신의 노여움으로 감수하듯이 무자비한 수탈 속에서도 가난도 이별도 견디어야만 하고 도리를 준열한 계율로 삼아온, 이 자각 없이 고행해 온 무리가 조선의 백성이요 수구파의 넓은 들판이다. 이조 오백년 동안 씨 뿌려놓은 유교 사상의 끈질긴 덩굴이며 무수한 열매인 것이다.
이 공자의 서자(庶子)들이 지금 도도히 흘러들어오는 약육강식하는 무리를 맞이하는 데 과연 무엇으로, 사람의 도리로 대적한단 말인가. 일본은 선진국이다. 물질문명의 선진국인 것이다.”
‘도리’, 작가가 짚어낸 이 단어가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의 아픔과 한을 관통한다.
자식된 도리, 지아비의 도리가 얽어매지 않았다면 용이와 월선이의 애끊는 사랑의 이야기가 이렇게 구비구비 이어지지도 않았으리라.
허리가 휘도록 농사를 지어도 식구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세상에 무슨 도리가 그리도 많았던지.. 지어미의 도리, 양반의 도리, 종놈된 도리.. 촘촘하게 조선 사회를 얽어맨 이 유교 사상과 도리들이 근대화된 좀 더 나은 세상으로의 자연스러운 발전을 원천 봉쇄하고 있었음이 답답하기만 하다.
주어진 신분의 비천함, 속박 속에 몸부림치며 살아가고 그러다 죽어가는 인물들의 삶이 박경리 작가의 눈을 통해 숨막힐 듯한 아름다움으로 그려진다. 그중에서도 환이와 별당아씨의 애틋한 사랑이 가장 마음을 아리게 한다.
“얼음조각같이 싸늘한 달이 능선 위에 댕그머니 있었다. 꺼무꺼무한 능선과 맞붙은 하늘을, 환이는 그 푸른 은빛 나는 하늘을 언제까지나 바라보고 서 있었다. 환(幻)이다. 바람개비같이 돌고 있는 지나간 지상의 세월은 지금 없는 것이다. 진실로 없는 것이다. 자취 없는 허무의 아가리였던 것이다. 여자와 더불어 영원히 사라져 버린 바람이었던 것이다. 능선을 감싸듯 푸른 은빛의 밤하늘, 영겁의 세월이 흐르고 있을 저 머나먼 곳에서 다시 여자를 만날 수 있는가고 환이는 자기 자신에게 물어본다.
여보?
나 명년 봄까지 살 수 있을는지..
산에 진달래가 필 텐데 말예요.
그 꽃 따 화전을 만들어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당신께 드리고 싶어요, 당신께, 당신께, 싶어요, 싶어요..
여자의 목소리는 진달래꽃 이파리가 되고, 꽃송이가 되고 계속하여 울리면서 진달래의 구름이 되고 진달래의 안개가 되고 숲이 되고 무덤이 되고, 붉은 빛줄기, 붉은 눈송이, 붉은 구름바다, 그 속을 자신이 걷고 있다는 환각 속에 환이는 쓰러졌다. 꿈속에서 울었다. 꿈속에서 가슴을 쳤다. 여자를 부르고 달려가고 울부짖고, 여자가 죽어 이별한 뒤 환이는 줄곧 꿈속에서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