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질문이 찾아온 순간
누구에게나 그 순간이 있다.
번역가에게는 DeepL이 자기보다 자연스러운 문장을 뱉어낸 순간. 일러스트레이터에게는 미드저니가 10초 만에 만든 그림이 자기의 이틀치 작업과 비교된 순간. 개발자에게는 AI가 자기가 짜려던 코드를 먼저 완성한 순간.
나한테는 —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 AI에게 "이 주제로 에세이 써줘"라고 했더니 꽤 괜찮은 초안이 나온 순간이었다.
명치가 서늘해졌다.
"이거... 나 없어도 되는 거 아냐?"
이 질문은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월급이 사라지면 무섭다. 하지만 더 깊은 곳에서 흔들리는 건 이거다 — 내가 10년 동안 쌓아온 것이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는 감각. 존재 가치의 기반이 흔들리는 느낌.
이 감각을 70년 전에 정확히 짚어낸 사람이 있다.
한나 아렌트의 세 가지 활동
한나 아렌트. 유대계 독일인,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정치철학자. 1958년, 인간의 조건이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세 층위로 나눈다.
첫 번째, 노동(labor).
생존을 위한 반복이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한다. 끝나면 다시 시작해야 한다. 어제 한 빨래가 내일의 빨래를 면제해주지 않는다. 노동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생명을 유지할 뿐이다.
두 번째, 작업(work).
세계에 무언가를 남기는 것이다. 테이블을 만들고, 건물을 짓고, 책을 쓰고, 소프트웨어를 개발한다. 노동과 달리 작업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결과물이 남는다. 인간은 작업을 통해 자연 위에 인공의 세계를 쌓는다.
세 번째, 행위(action).
아렌트가 가장 중요하게 본 것이다. 행위란 타인 사이에서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이다. 말을 꺼내고, 약속하고, 용서하고, 설득하고, 저항하는 것. 행위는 반드시 다른 인간을 필요로 한다. 혼자서는 행위할 수 없다.
노동은 생명이 시키는 것이고, 작업은 유용성이 시키는 것이고, 행위는 자유가 시키는 것이다.
이 구분이 왜 중요하냐면 — AI가 먹어치우고 있는 것의 정체를 정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AI는 무엇을 가져가는가
솔직해지자.
AI는 '노동'의 상당 부분을 이미 가져갔다. 데이터 입력, 분류, 요약, 정리, 반복 메일, 일정 관리. 이것들은 끝나면 다시 시작해야 하는, 흔적 없는 작업들이다. 아렌트의 정의 그대로 — 노동.
그리고 지금, '작업'의 영역으로 올라오고 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코드를 짜고, 음악을 만든다. 결과물이 남는다. 품질도 나쁘지 않다. 때로는 좋다.
이게 우리가 공포를 느끼는 지점이다. 노동을 가져갈 때는 "편하네" 했다. 작업을 가져갈 때는 "나는 뭔데"가 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작업'에 걸어두고 있으니까. 나는 디자이너다, 나는 개발자다, 나는 작가다.
하지만 아렌트는 인간의 가장 높은 활동을 작업이 아니라 행위에 두었다. 왜?
행위는 계산할 수 없다
작업은 계획 가능하다. 설계도를 그리고, 재료를 모으고, 순서대로 만든다. 입력과 출력이 예측 가능하다. 그래서 AI가 할 수 있다. 학습 데이터로 패턴을 추출하고, 그 패턴에 맞춰 결과물을 생성한다.
행위는 다르다.
행위는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하다. 아렌트가 행위의 핵심으로 꼽은 것은 '탄생성(natality)' — 세상에 아직 없던 것을 시작하는 능력이다. 모든 인간은 태어남으로써 세상에 유일한 존재로 도착하고, 그 유일성으로부터 이전에 없던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회의실에서 아무도 꺼내지 않는 말을 꺼내는 것. 실패가 뻔한 프로젝트를 "그래도 해보자"고 시작하는 것. 갈등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내가 사과할게"라고 먼저 말하는 것. 모두가 동의하는 자리에서 "잠깐, 다르게 생각해봤는데"라고 말하는 것.
이것들은 계산의 결과가 아니다. 용기의 결과다.
AI는 패턴에서 최적의 답을 찾는다. 행위는 패턴을 깨는 것이다. AI는 위험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행위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AI는 데이터가 있어야 작동한다. 행위는 데이터가 없는 곳에서 시작된다.
당신이 진짜 잃을까봐 두려운 것
여기서 한 겹 더 들어가자.
"AI가 내 일자리를 뺏으면"이라는 질문의 진짜 구조를 뜯어보면, 사실 두 가지 질문이 포개져 있다.
하나. 돈을 어떻게 벌지? — 이건 현실적인 문제다. 중요하고, 긴급하다.
둘. 나는 어떻게 가치 있는 사람이지? — 이건 실존적인 문제다. 더 깊고, 더 오래간다.
첫 번째 질문에는 경제학이 답해야 한다. 재교육, 사회 안전망, 새로운 직업 구조. 이건 정책의 영역이다.
두 번째 질문에는 아렌트가 답한다. 당신의 가치는 생산성에 있지 않다.
이게 뼈아픈 말인 이유가 있다. 우리 사회는 수십 년간 인간의 가치를 생산성으로 환산해왔다. 연봉이 높은 사람이 가치 있고, 생산적인 사람이 존경받고, "뭐 하시는 분이에요?"가 첫 인사다.
AI는 이 등식을 부순다. 생산성으로 치면 AI를 이길 수 없으니까. 그리고 등식이 부서진 자리에서 비로소 질문이 가능해진다 — 그러면 진짜 가치는 어디에 있었던 거지?
아렌트의 답: 사람 사이에 있다.
사이에서 시작하기
아렌트에게 행위는 반드시 복수성(plurality) — 서로 다른 사람들 사이 — 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혼자서 행위할 수 없다. 나와 다른 사람이 있어야 대화가 되고, 설득이 되고, 갈등이 되고, 화해가 된다.
AI는 혼자 작동한다. 입력과 출력. 사용자와 도구. 거기에 '사이'는 없다.
인간은 사이에서 산다. 동료와의 마찰, 상사와의 긴장, 고객과의 오해, 팀원과의 합의. 이 모든 불편한 것들이 행위의 현장이다.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이유는 기술적 한계 때문이 아니라, 행위란 근본적으로 한 존재만으로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실제로 뭘 어떻게 하라는 건가?
실천: 노동을 넘겨주고 행위를 되찾아라
추상적인 철학을 구체적으로 바꿔보자.
먼저, 당신의 하루를 세 층위로 나눠봐라.
오늘 한 일 중에 노동은 뭔가? — 반복적이고, 끝나면 다시 해야 하고, 나 아니어도 되는 것.
작업은 뭔가? — 결과물이 남고, 내 판단이 들어가는 것.
행위는 뭔가? —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용기를 내서, 새로운 것을 시작한 것.
많은 사람들의 하루는 노동 70%, 작업 25%, 행위 5%쯤 될 거다.
AI에게 노동을 넘겨라. 일정 정리, 이메일 분류, 데이터 입력, 반복 보고서. 이건 AI가 잘한다. 미안해할 필요 없다. 아렌트의 기준에서 이건 인간 고유의 활동이 아니다.
작업에서는 AI와 협업하라. 글을 쓸 때 AI에게 초안을 맡기고, 당신은 판단과 방향을 잡아라. 디자인의 시안을 AI가 만들고, 최종 결정은 당신이 내려라. 작업의 가치는 결과물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판단에 있다.
행위의 시간을 늘려라. 회의에서 어려운 말을 꺼내라. 동료에게 피드백을 요청하라. 실패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제안하라. 사과해야 할 사람에게 사과하라. 이건 AI가 대신 해줄 수 없다. 이건 당신만이 할 수 있다.
일자리가 아니라 활동이 문제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AI가 내 일자리를 뺏으면?"
아렌트라면 아마 이렇게 되물었을 것이다.
"당신이 잃어버리는 건 일자리인가, 활동인가?"
일자리는 사회가 부여한 것이다. 없어질 수 있고, 바뀔 수 있고, 대체될 수 있다. 하지만 활동 — 특히 행위 — 는 인간 존재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당신이 살아 있고, 다른 사람들 사이에 있는 한, 행위할 능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AI는 당신의 노동을 가져갈 수 있다.
작업의 일부도 가져갈 수 있다.
하지만 당신이 누군가 앞에서 말을 꺼내는 것,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선택하는 것, 관계 속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 —
그건 못 가져간다.
가져갈 수 없는 게 아니라, 가져갈 대상 자체가 아니다. 행위는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니까.
명치의 서늘함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서늘함이 당신을 마비시키지 않게 하는 방법은 있다.
노동을 넘기고, 작업에서 협업하고, 행위를 되찾아라.
당신의 가치는 생산성에 있었던 게 아니라, 사람 사이에서 시작하는 용기에 있었다.
그건 AI 이전에도, 이후에도, 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