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한다'는 함정
그 순간
디자이너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평소와 다른 목소리였다.
"나 오늘 미드저니로 시안 만들어서 클라이언트한테 보여줬거든. 세 개. 한 10분 걸렸어."
"빠르다."
"클라이언트가 바로 골랐어. 수정도 거의 없었고. 근데 나 그거 보내고 나서 한 시간 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어."
"왜?"
"10분이야. 내가 이틀 걸릴 걸 10분에 한 거야. 근데 그게 기쁜 게 아니라..."
말끝을 흐렸다.
"...나 없어도 되는 거잖아."
나는 아무 말도 못 했다. 나도 같은 생각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
AI에게 에세이 주제를 달라고 했더니 꽤 괜찮은 목록이 나왔을 때. AI가 쓴 초안이 내 초안보다 구조적으로 나았을 때. 내가 고민하는 시간에 AI는 이미 완성본을 내놓았을 때.
그때마다 찾아오는 질문. 짧고 날카로운.
나는 뭔데?
'잘한다'는 함정
이 질문의 밑바닥을 파보면, 하나의 공식이 깔려 있다.
나 = 내가 잘하는 것
나는 디자이너다. 왜? 디자인을 잘하니까. 나는 번역가다. 왜? 번역을 잘하니까. 나는 작가다. 왜? 글을 잘 쓰니까.
이 공식이 작동하려면 전제가 필요하다 — 내가 '잘하는' 상태가 유지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보다, 혹은 적어도 기계보다는 나아야 한다.
AI가 그 전제를 부순다.
디자인을 잘하는 게 나의 정체성이었는데, AI가 더 잘하면? 번역이 나의 존재 이유였는데, AI가 더 빠르고 정확하면? 코딩이 나의 밥벌이이자 자부심이었는데, AI가 10초 만에 끝내면?
공식이 깨진다. 그리고 공식이 깨지면 등식의 왼쪽 — '나' — 도 함께 흔들린다.
하지만 이 공식 자체가 처음부터 틀렸다면?
사르트르: 당신은 '무엇'이 아니다
장 폴 사르트르. 프랑스 철학자. 1945년, 파리의 한 강연장에서 그의 가장 유명한 명제를 던졌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딱딱한 말이다. 풀어보자.
가위를 생각해보자. 가위는 만들어지기 전에 이미 '용도'가 정해져 있다. 종이를 자르기 위해 설계되었다. 본질(용도)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실존(물건)이 만들어진다.
사르트르는 묻는다 — 인간도 그런가?
아니라고 답한다.
인간은 먼저 세상에 던져진다. 아무 설계도 없이.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은 없다. '번역가가 될 운명'으로 출생한 사람도 없다. 우리는 그냥 — 있다. 실존이 먼저다.
그 다음에 우리가 스스로 본질을 만든다. 디자인을 선택하고, 번역을 선택하고, 글쓰기를 선택한다. 선택이 축적되어 '나'가 형성된다.
가위는 종이를 자르기 위해 존재한다. 인간은 — 아무것을 위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인간의 자유다.
이게 AI와 무슨 상관인가
전부다.
AI는 사르트르의 용어로 말하면 완벽한 '가위'다.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 언어 모델은 '텍스트를 생성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이미지 모델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설계되었다. 용도가 먼저, 존재가 나중.
그래서 AI는 '잘한다'. 잘하도록 만들어졌으니까. 텍스트 생성이라는 본질에 최적화된 존재.
인간은 다르다. 당신은 글을 쓰도록 '설계'되지 않았다. 디자인을 하도록 '프로그래밍'되지 않았다. 당신은 어느 날 글을 쓰기로 결심했고, 디자인을 선택했다. 그 선택 이전에 당신은 이미 존재했다.
AI가 당신보다 디자인을 잘한다는 건, AI가 당신보다 '나은 존재'라는 뜻이 아니다. 가위가 손보다 종이를 잘 자른다고 해서, 가위가 손보다 나은 존재인 건 아니듯이.
비교 자체가 범주 오류다.
"나 없어도 되는 거잖아"의 오류
디자이너 친구의 말로 돌아가보자.
"나 없어도 되는 거잖아."
이 문장을 사르트르식으로 분석하면 이렇다:
• 전제: 나의 가치 = 나의 기능 (디자인 시안 만들기)
• 사실: AI가 그 기능을 더 잘 수행함
• 결론: 나의 가치 = 0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전제가 틀렸다.
친구는 10분 만에 시안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전에 무엇이 있었나? 클라이언트가 "이런 느낌"이라고 모호하게 말한 걸 알아듣는 능력. 세 개의 시안 중 어떤 조합이 설득력 있을지 판단하는 감각. 클라이언트가 진짜 원하는 게 뭔지 대화에서 읽어내는 경험.
AI는 시안을 만들었다. 하지만 무슨 시안을 만들지를 결정한 건 친구다. 이건 기능의 영역이 아니라 선택의 영역이다.
사르트르에게 인간의 본질은 능력이 아니라 선택이다. 당신이 디자이너인 건 디자인을 잘해서가 아니라 디자인을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AI가 디자인을 아무리 잘해도, 디자인을 하기로 선택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자유라는 짐
여기서 사르트르가 불편해진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위로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무거운 선고다. 왜냐하면 이 말의 이면은 이것이기 때문이다:
핑계댈 본질이 없다.
"나는 원래 디자이너니까 디자인을 해야 해" — 이런 변명이 불가능하다. 원래 디자이너인 사람은 없으니까. 매일 아침 당신은 디자인을 다시 선택하고 있는 거다.
AI가 디자인을 더 잘하게 되었을 때, "그래도 계속 디자인하겠다"고 선택할 수도 있고, "다른 걸 하겠다"고 선택할 수도 있다. 둘 다 정당하다. 정당하지 않은 건 "어쩔 수 없잖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걸 자유의 형벌이라 불렀다. 우리는 자유롭도록 저주받았다. 선택하지 않을 자유조차 없다 — 선택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니까.
AI 시대에 이 형벌은 더 무거워진다. 이전에는 "나는 이것밖에 못 하니까"라는 핑계가 있었다. 이제는 AI가 거의 다 하니까, "그래서 뭘 할 건데?"라는 질문이 피할 수 없이 돌아온다.
타인의 시선이라는 함정
"AI가 나보다 잘하면"이라는 질문에는 또 다른 층위가 있다. 비교라는 것.
사르트르의 또 다른 유명한 문장. "지옥은 타인이다."
자주 오해되는 말이다. 사르트르가 말한 건 "사람이 싫다"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 나를 '대상'으로 고정시킨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바라볼 때, 나는 가능성이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선택의 연속. 하지만 타인이 나를 바라볼 때, 나는 '디자이너', '번역가', '작가'라는 라벨로 고정된다. 대상이 된다.
AI와의 비교에서 고통스러운 건, 사실 AI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다. 클라이언트가 AI 결과물과 내 결과물을 비교하는 시선. 동료가 "그거 AI한테 시키면 되지 않아?"라고 말하는 시선. 시장이 나의 기능을 AI의 기능과 저울에 올리는 시선.
이 시선에 굴복하면, 나는 기능으로 환원된다. AI보다 나은 기능을 찾아 끝없이 도망쳐야 한다.
이 시선을 거부하면, 다른 질문이 가능해진다.
질문을 바꿔라
"AI가 나보다 잘하면 나는 뭔데?"
이 질문을 사르트르식으로 바꾸면 이렇다:
"AI가 잘하는 건 알겠고 — 나는 뭘 하기로 할 건데?"
미묘하지만 완전히 다른 질문이다.
첫 번째 질문은 능력을 묻는다. 비교를 전제한다. 답은 항상 불안하다 — AI는 계속 나아지니까.
두 번째 질문은 선택을 묻는다. 비교가 필요 없다. 답은 나한테 있다.
AI가 그림을 더 잘 그려도, "나는 그림을 그리기로 한다"고 선택할 수 있다. 그 선택은 AI의 성능과 무관하다. 그림이 내 삶에 의미를 주기 때문에, 그리는 과정이 좋기 때문에, 혹은 그냥 그리고 싶기 때문에.
능력이 정체성이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AI가 그 등식을 부쉈다.
남은 건 선택이다.
매일 아침의 선택
사르트르의 철학이 냉정한 건 사실이다. "알아서 선택해"는 위로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게 오히려 해방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디자이너니까 디자인을 해야 해"에서 벗어나면, "나는 오늘 디자인을 하기로 했어"가 된다. 의무가 아니라 결단. 관성이 아니라 의지.
AI가 나보다 잘해도 내가 하는 이유. 그건 능력의 증명이 아니라 존재의 선언이다.
디자이너 친구에게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너 없어도 시안은 나오지. 근데 그 시안을 만들자고 결정한 건 너잖아.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걸 읽어낸 것도 너고. 세 개 중에 이 조합이 좋겠다고 판단한 것도 너고."
"..."
"AI는 시안을 만든 거야. 너는 시안을 선택한 거야. 그 차이가 너인 거지."
친구가 한참 있다가 말했다.
"그래도 좀 억울하긴 하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사르트르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거다. 자유는 원래 좀 억울한 거다.
하지만 그 억울함 속에서 선택하는 것 — 그게 인간이라는 거다.
AI에게는 억울함도, 선택도, 존재의 무게도 없다.
당신에게는 있다.
그게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