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게 자동화되면 삶의 의미가 있나?

이걸 왜 하고 있지?

by 박현아

완벽한 하루


상상해보자.


아침 6시 47분. AI가 렘수면 사이클에 맞춰 깨운다. 커튼이 자동으로 열리고, 커피 머신이 작동한다. 샤워 온도는 어제 선호도에 맞춰 38.2도. 출근복은 오늘 날씨와 일정에 맞춰 AI가 골라놨다.


출근길. 자율주행차 안에서 AI가 오늘의 브리핑을 읽어준다. 이메일은 분류되어 있고, 미팅 자료는 요약되어 있고, 오후 발표 슬라이드 초안은 완성되어 있다. 점심은 영양 균형과 예산에 맞춰 예약되어 있다.


퇴근 후. AI가 추천한 넷플릭스를 보고, AI가 분석한 수면 패턴에 맞춰 잠든다.


완벽하다. 효율적이다. 편하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이걸 왜 하고 있지?


모든 것이 최적화되어 있다. 불편한 것이 없다. 실패할 일이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텅 빈 느낌이지?


이 공허함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있다. 인류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찾아낸 사람.



빅터 프랭클: 모든 것을 빼앗긴 남자


빅터 프랭클.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 1942년, 아내, 부모, 형제와 함께 나치 수용소에 끌려갔다.


아우슈비츠. 다하우. 3년간 네 개의 수용소를 거쳤다. 가족은 전부 죽었다. 아내도 죽었다. 수용소에 들어가기 전에 거의 완성했던 원고도 빼앗겼다. 평생의 연구가 사라졌다.


남은 건 벌거벗은 몸 하나. 번호로 불리는 존재. 언제 죽을지 모르는 하루하루.


모든 것이 빼앗긴 상태 — 직업, 가족, 자유, 존엄, 소유물, 심지어 이름까지.


이 상태에서 프랭클은 관찰했다. 같은 수용소, 같은 조건, 같은 굶주림 속에서 — 어떤 사람은 무너지고, 어떤 사람은 버텼다.


차이는 뭐였을까?


체력이 아니었다. 건장한 사람이 먼저 쓰러지는 경우도 많았다. 지능이 아니었다. 교수와 의사가 노동자보다 빨리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프랭클이 발견한 차이는 단 하나였다.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진 사람은 버텼다. 이유를 잃은 사람은 무너졌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프랭클은 니체의 말을 자주 인용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이든 견딜 수 있다."


수용소에서 프랭클이 본 것:


어떤 남자는 수용소 밖에서 자기를 기다리는 아이를 생각하며 버텼다. 매일 밤, 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잠들었다. 죽을 수 없었다. 돌아가야 했으니까.


어떤 여자는 자기가 쓰던 논문을 완성하겠다는 생각으로 버텼다. 종이가 없어서 머릿속으로 문장을 만들고, 고치고, 외웠다. 죽을 수 없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어떤 노인은 매일 아침 다른 수감자에게 빵을 나눠줬다. 자기도 굶주리면서. 죽을 이유가 없었던 게 아니라, 줄 이유가 있었다.


반대로.


"집에 돌아가봤자 아무도 없어"라고 말한 사람은 대부분 몇 주 안에 죽었다. 질병이나 굶주림이 아니라, 프랭클의 표현으로는 — '내면의 항복'에 의해. 살아야 할 이유가 없으면, 몸이 먼저 포기했다.



의미는 조건에 붙어 있지 않다


여기서 프랭클의 핵심 통찰이 나온다.


우리는 보통 이렇게 생각한다. 조건이 좋으면 의미가 생긴다. 좋은 직업, 안정된 수입, 건강한 몸, 사랑하는 사람. 이런 조건이 갖춰지면 삶에 의미가 있다.


프랭클이 발견한 건 정반대였다.


의미가 있으면 어떤 조건이든 견딘다.


수용소는 인류 역사상 가장 나쁜 조건이었다. 의미를 줄 수 있는 외부 조건은 전부 제거되어 있었다. 직업 없음. 가족 없음. 자유 없음. 소유 없음. 미래 없음.


그런데도 의미를 찾은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살아남았다.


의미는 바깥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의미는 — 프랭클의 말을 빌리면 —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었다.


이 순서가 중요하다.


보통: 우리가 삶에게 묻는다. "내 삶의 의미는 뭐야?"


프랭클: 삶이 우리에게 묻는다. "이 상황에서 너는 뭘 할 거야?"


질문의 방향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뀐다.



자동화와 무의미


이제 AI 시대로 돌아오자.


수용소와 자동화 시대는 정반대처럼 보인다. 수용소는 모든 것이 빼앗긴 상태. 자동화는 모든 것이 주어진 상태. 극단적 결핍 vs 극단적 풍요.


하지만 프랭클의 렌즈로 보면, 두 상황은 같은 질문을 던진다.


"삶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수용소에서 의미가 사라진 건, 외부 조건이 박탈되었기 때문이다.


자동화 시대에 의미가 사라지는 건, 외부 조건이 충족되었기 때문이다.


결핍도 의미를 위협하지만, 충족도 의미를 위협한다.


왜?


의미감의 상당 부분은 노력과 저항에서 온다. 추운 날 걸어서 출근해서 따뜻한 사무실에 도착할 때의 안도. 어려운 프로젝트를 밤새 작업해서 마감에 맞췄을 때의 성취. 서툰 요리를 연습해서 처음으로 맛있게 됐을 때의 기쁨.


자동화는 이 저항을 제거한다. 출근을 자율주행차가 대신하고, 프로젝트를 AI가 마감하고, 요리를 로봇이 만든다. 결과는 같거나 더 좋다. 하지만 과정에서 오던 의미가 사라진다.


프랭클은 이런 상태를 실존적 공허(existential vacuum)라고 불렀다. 생존의 문제가 해결된 뒤에 찾아오는 공허. "먹고살 걱정은 없는데, 뭘 위해 사는지 모르겠다."


프랭클이 이 개념을 제시한 건 1946년이다. 전후 유럽의 풍요 속에서 우울증과 자살이 급증하는 것을 보면서. 80년 뒤, AI가 이 공허를 한 차원 더 깊게 만들고 있다.



세 가지 의미의 원천


그러면 프랭클의 답은?


그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경로를 세 가지로 제시했다.


첫째,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 일, 작품, 프로젝트. 세상에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에서 의미가 생긴다.


"하지만 AI가 더 잘 만드는데?"


프랭클이라면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 의미는 결과물의 '질'에 있지 않다. 창조하는 행위 자체에 있다. 아이가 그린 서툰 그림이 미술관의 걸작보다 부모에게 의미 있는 건, 그림의 질 때문이 아니라 '아이가 그렸다'는 행위 때문이다.


AI가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어도, 내가 쓰는 글에는 내가 쓰는 행위의 의미가 있다. 그 의미는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둘째, 무언가를 경험하는 것. 자연, 예술, 사랑. 세계를 깊이 경험하는 데서 의미가 생긴다.


수용소에서 프랭클은 이런 장면을 목격했다. 수감자들이 작업장으로 끌려가는 길에, 하늘에 노을이 졌다. 한 수감자가 다른 수감자에게 속삭였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굶주리고, 얼어붙고, 내일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 노을을 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 이건 최적화할 수 없다. 자동화할 수 없다. AI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당신 대신 노을에 감동할 수는 없다.


경험은 대리할 수 없다. 그래서 경험에는 늘 의미가 있다.


셋째, 피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태도. 프랭클이 가장 중시한 것이다.


삶에는 없앨 수 없는 고통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돌이킬 수 없는 실패, 치료할 수 없는 질병. 자동화도 AI도 이것들을 해결할 수 없다.


프랭클은 말한다 — 이 고통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인간 존엄의 마지막 보루다.


수용소에서 빵을 나눠준 노인은 자기 고통을 없앨 수 없었다. 하지만 고통 속에서도 나눌 수 있었다. 그 '나눔'이 그의 의미였다.


자동화가 모든 불편을 없애도, 인간의 근본적 조건 — 유한성, 상실, 죽음 — 은 없앨 수 없다. 그리고 바로 그 조건 앞에서의 태도가 자동화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의미의 원천이다.



빈 시간의 공포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자.


자동화가 주는 가장 구체적인 위협은 '의미의 상실'이라는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빈 시간이다.


AI가 하루 업무의 절반을 처리하면, 나머지 시간에 뭘 하지?


AI가 집안일을 다 하면, 주말에 뭘 하지?


AI가 은퇴 후 재정 관리까지 해주면, 노후에 뭘 하며 살지?


이 질문이 불안한 건, 우리가 '비어 있는 시간'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인의 삶은 바쁨으로 채워져 있다. 바쁨은 의미의 대용품이었다. "나는 바쁘다, 고로 존재한다."


자동화가 바쁨을 제거하면, 대용품이 사라진다. 진짜 의미가 있었던 사람은 괜찮다. 바쁨으로 의미를 대체하고 있던 사람은 — 패닉이 온다.


프랭클은 이것을 '일요일 신경증(Sunday neurosis)'이라고 불렀다. 평일에는 일로 바쁘다가, 일요일에 갑자기 비면 공허가 밀려오는 현상. AI 시대에는 매일이 일요일이 될 수 있다.



실천: 의미를 설계하라


프랭클의 철학을 자동화 시대에 적용하면:


첫째, 자동화할 것과 하지 않을 것을 구분하라.


모든 것을 자동화하지 마라. 의도적으로 비효율을 남겨라.


직접 요리하는 시간. 손으로 편지를 쓰는 시간. 걸어서 출퇴근하는 시간. 이것들은 '낭비'가 아니라, 경험의 시간이다. 프랭클의 두 번째 경로 — 경험에서 의미를 찾는 것.


AI가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다르다. 전자는 효율의 문제, 후자는 의미의 문제다.


둘째, 누군가를 위한 일을 만들어라.


프랭클의 세 가지 경로 중 가장 강력한 건, 사실 셋 다에 걸쳐 있는 하나의 공통점이다 — 자기 바깥으로 향하는 것.


누군가를 위해 만들고, 누군가와 함께 경험하고, 누군가를 위해 고통을 견딘다. 의미는 자기 안에서 발견하는 게 아니라, 자기 밖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프랭클은 이것을 자기 초월(self-transcendence)이라 불렀다. 자기 너머의 무언가를 향할 때, 의미는 부산물처럼 따라온다.


자동화가 나의 시간을 비워주면, 그 시간을 나를 위해 쓸 수도 있고, 남을 위해 쓸 수도 있다. 프랭클의 답은 명확하다 — 남을 위해 쓸 때, 의미가 생긴다.


셋째, 질문의 방향을 바꿔라.


"모든 게 자동화되면 삶의 의미가 있나?"


이 질문을 프랭클식으로 뒤집으면:


"모든 게 자동화된 이 상황에서, 삶은 나에게 무엇을 묻고 있는가?"


당신의 시간이 비워졌다. 당신의 노동이 필요 없어졌다. 당신의 기능이 대체되었다.


그래서 — 뭘 할 건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 자체가 의미다. 답이 거창할 필요 없다. "오늘 친구에게 전화하겠다." "어제 시작한 글을 마저 쓰겠다." "저녁에 직접 요리하겠다." "산책하면서 하늘을 보겠다."


작은 답이어도 된다. 중요한 건 내가 응답했다는 것이다.



수용소와 풍요 사이에서


프랭클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뒤, 비엔나로 돌아와 강연을 다녔다. 유럽은 전후 복구 중이었고, 물질적 풍요가 빠르게 돌아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전쟁의 참혹함에서 벗어나 안도하고 있었다.


그때 프랭클은 경고했다.


"풍요가 의미를 보장하지 않는다. 수용소에서도 의미를 찾은 사람이 있었고, 풍요 속에서도 의미를 잃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80년 뒤,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다. AI가 노동을 대신하고, 자동화가 불편을 제거하고, 기술이 삶의 마찰을 매끄럽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우울증은 사상 최고치다. "삶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검색어가 매년 늘고 있다.


프랭클이 맞았다.


조건은 의미를 주지 않는다. 결핍도, 풍요도. 의미는 조건에 붙어 있지 않다. 의미는 — 언제나 — 그 조건 앞에 선 인간의 응답에 있다.


모든 게 자동화되어도, 삶은 여전히 당신에게 묻고 있다.


"그래서, 뭘 할 건데?"


이 질문이 들리는 한, 의미는 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