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주차장에서 받은 과일봉투
광고회사에서 일하며 거의 매일 겪는 일상이지만, 그 날따라 클라이언트의 부당한 갑질, 우매한 의사결정에 눈물이 쏟아지도록 화가 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직 오후였지만 집에 가고 싶었다. 주차장에 내려가 내 차로 가는데, 누군가 뒷머리를 긁으며 다가왔다. 손에 종이봉투가 들려있었다. 문제의 클라이언트를 담당하는 기획팀장이다. 그가 뭐라 한 두 마디 했었던 것도 같고 그냥 쑥스러워하며 불쑥 종이봉투를 내게 내밀고 후다닥 달아났던 것도 같다. 차에 앉으며 종이봉투를 열어보니 과일이 몇 알 들어있었다. 쪽지도 있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기억나는 건 클라이언트의 그 난리에 기획팀장이 잘못한 건 없다는 것. 같은 피해자면 피해자였지. 그런데도 그는 소심한 제작팀장이 마음을 다쳤으리라 짐작해 나를 앞질러 주차장에 내려온 거다. 대체 언제부터 얼마나 거기 서있었던 걸까?
그는 스포츠광. 틈만 나면 MLB나 NBA를 끼고 살더니 결국 광고회사를 그만두고 스포츠마케팅 회사 상무가 되었다. 일전에 페이스북에서 국내프로야구의 빈볼 사태를 두고 분개하던 그를 본 적이 있다. 선뜻 좋아요-를 눌렀다. 스포츠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동료가 빈볼에 맞았을 때 나 개인의 손해를 감수하고 팀을 위해 던지는 보복구도 스포츠의 일부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공에 대해 인정하고, 책임을 지고, 미안해 할 수 있는 마음이야말로 스포츠맨쉽의 코어라고 나는 생각한다. 승부는 당당해야 하고, 언뜻 생각할 수 있는 것과 반대로 당당한 사람은 대개 따뜻한 사람인 법이다.
그가 쓴 책을 읽는다. 출근 가방에 그 책을 꽂고 나오는 내내 그 어느날 컴컴한 지하주차장에서 과일봉투를 들고 뻘쭘하게 서있던 마음 따뜻한 스포츠맨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