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하루에 이름을 붙여보자
새로운 삶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미국.
더 이상 낯설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주재원 가족’이라는 이름도 이제는 익숙했고,
짐을 푸는 일도,
아이와 함께하는 낯선 외국도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영어강사였으니까.
중국과는 다르게 미국에서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래서일까, 처음부터 일이 술술 풀였다.
아이는 금세 학교에서 적응했고,
남편은 익숙한 업무로 다시 바빠졌다.
집은 넓어졌고,
나는 그 속에서 조용히 혼자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여전히 집안일은 끝이 없고,
시간은 많아도, 시간이 항상 부족하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지?‘
‘나는 여기서 뭘 해야 할까?’
그렇게, 아무도 묻지 않는 길을 찾아야 했다.
텅 빈 시간을 채우기 위해, 작고 사소한 루틴을 만들기 시작했다.
오전에는 가볍게 청소를 하고,
커피를 내려 좋아하는 창가에 앉았다.
미국살이의 하루는 대부분 요리에 쓰였고,
가끔은 다른 주재원 엄마들과 점심을 먹거나,
아이들이 함께 모여 노는 걸 보며 웃기도 했다.
브런치 모임과 수다 모임, 플레이데이트 같은 자리가 점점 늘어갔다.
즐거웠다.
웃고 떠들고, 아이도 잘 적응해 보였다.
겉으로는 전혀 부족할 게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바쁘게 보낸 하루 끝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기분이
익숙하게 찾아왔다.
시간도, 돈도 썼는데 나는 자라지 않았다.
‘나는 지금 앞으로 나아가고 있나?’
그런 질문을 던진 채 눈을 감았다.
그래서 아주 작게, 하루에 30분.
나를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별 거 없는 하루, 별 거 아닌 일상 정도.
책 한 권을 읽고, 마음에 드는 문장을 메모했다.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도, 평가를 위한 것도 아닌
오직 나만을 위한 시간.
대단한 변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나는 소모되지 않는 삶을 살고 싶었다.
바쁘지 않을 날엔, 생각을 조금씩 정리했다.
그러다 펜을 들어 몇 자 적어보기도 했다.
‘지금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뭘까?’
그리고 멈췄다.
의미 없는 만남 대신, 나를 위한 시간을 선택했다.
작고 조용하게, 내 삶을 설계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침에는 글을 쓰고, 책을 읽고, 메모를 했다.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아도 좋았다.
그 시간엔 비교도, 비난도, 해석도 없었으니까.
오롯이 나만의 공간.
그 안에서 나는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그렇게 변한 내 일상은
내 아이와 남편에게도 더 단단한 나를 보여줬다.
더 여유롭고, 중심이 잡힌 엄마.
흔들리지 않는 아내.
나는 알게 됐다.
무엇이 진짜 중요한지.
훗날 나는,
지금의 이 시간들을
글로 전하고, 말로 나눌 수 있기를 바란다.
그건 유명해지는 것도, 특별한 존재가 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와 같은 마음과 고민들로 멈춰 선 누군가에게
그저 내가 지나온 시간을 조용히 건넬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 나는 내 하루에 이름을 붙인다.
‘나를 키운 하루’라고.
이 글은 5편 완결 에세이 시리즈
<일을 멈춘 순간, 삶이 시작됐다> 입니다.
1. 일을 그만두고 나를 바라본 하루
2. 가정주부로 사는 건 쉬운 줄 알았다
3. 엄마는 쓰러질 수 없다
4. 나를 채우는 연습
5. 안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