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서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속주머니 깊은 곳에 묵혔던 사표에 손이 갔습니다. 당장 면담 신청하고 보란 듯이 내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래야 당장 터질 것 같은 심장이 진정될 터였습니다. 잔뜩 굳은 표정으로 모니터만 바라봤습니다. 점심 먹으러 가라는 상사의 말도 귓등으로 들었습니다. 모두 나간 사무실에 혼자되니 그제야 조금 진정이 됩니다. 전달 경비 청구서를 작성하니 점심시간이 30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입맛도 없습니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사무실을 나섰습니다. 음악을 들으며 주변을 걸었습니다. 걸으며 다시 생각했습니다. 이대로 사표 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는 감당할 준비가 되었나? 이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까? 어차피 한 번은 맞을 상황이 조금 빨리 왔다고 생각할까? 나는 충분히 준비된 게 맞을까? 당장 다음 달 월급만큼 벌 수 있을까?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이어집니다. 사표 내는 게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닌가 봅니다.
30분 걷고 나니 마음은 어느 정도 진정됐습니다. 사표에 갔던 손을 다시 돌려놓았습니다. 오후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정신없이 해야 그나마 시간을 맞출 것 같습니다. 이런 때 몰입만큼 좋은 게 없습니다. 일에 빠지는 동안 다른 생각이 안 나죠. 한참을 또 달렸습니다. 기분도 조금은 풀렸습니다. 이성을 되찾은 거죠. 그즈음 업무로 다툼이 있었던 상사가 해결책을 제시해 주며 분위기가 누그러졌습니다. 다행입니다.
지난 7년 동안 읽고 쓰는 삶을 살았습니다. 거기에 가르치는 일도 2년 전부터 시작했습니다. 작가이자 강사는 '나라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퇴직 후 직업으로 정했습니다. 직업인으로 역량을 갖추기 위해 7년 동안 한결같은 일상을 살아왔고요. 하지만 막상 사표를 마주하니 어딘지 모를 불안이 밀려왔습니다. 왜일까요? 아직 준비가 덜 된 걸까요?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직장을 그만두는 건 직장인에겐 로망입니다.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거죠. 그렇다고 모두가 바라는 모습으로 이어지는 건 아닙니다.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딜 때보다 더 많은 시간 준비가 필요할 것입니다. 퇴직 후 내 일을 하는 건 남은 삶의 생존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죠. 허투루 했다가는 나는 물론 가족에게까지 피해를 입히니까요. 그러니 더 신중하고 더 준비하고 더 숙고해야 합니다.
직장에 다니면 사표에 손이 가는 상황 숱하게 이어집니다. 지난 15년 동안 9번 이직했던 저가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별의별 이유로 사표 내고 도망치고 폐업하길 9차례였습니다. 무작정 사표 던지는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득 보다 실이 많았죠. 누구보다 잘 알기에 마지막 사표는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중입니다. 이제까지 잘 참아낸 제가 한편으로 대견합니다. 잘 버텨내고 있습니다.
사정이 이러니 제가 해야 할 게 분명히 보입니다. 작가이자 강사의 역량을 더 키우는 것입니다. 스스로에 자신감이 붙으면 사표는 언제 던져도 무방합니다. 어쩌면 두 일을 병행해도 직업인의 삶에 더 재미를 가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 열심히 더 재미있게 내 일을 하면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입니다. 당연히 수입도 나아지면 그때는 정말 사표를 던질 수 있겠죠. 아무런 미련 없이 말이죠.
반나절 마음에 쿠데타가 일었습니다. 음악과 사색 덕분에 진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생각했습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게 무엇인지를요. 그러고 나서 다시 마음을 다 잡았습니다. 당분간은 작가와 강사의 역량을 키우는 데 더 집중할 것입니다. 그러다 때를 두고 볼 것입니다. 머지않아 그때가 온다면 아무런 미련 없이 사표를 낼 겁니다. 그리고 직업인으로서 당당하게 살겠습니다. '나라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