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하기까지 50년 걸렸다면 믿겠습니까? 50년은 제가 살아온 시간입니다. '무언가'는 클래식 음악을 듣기 위해 공연장을 찾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50이 되어서야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기 위해 제 발로 공연장을 찾았습니다.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요?
43살까지 저에게 없었던 2가지가 있었습니다. 책과 음악이었습니다. 책은 일찍부터 읽지 않았고, 음악이라고 해야 어쩌다 대중가요 듣는 게 전부였죠. 한 마디로 문화생활과 거리가 먼 삶을 살았죠. 그나마 영화를 즐겨보는 데 만족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삶의 풍요는 영화로만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삶이 풍요롭지 않다는 건 결핍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저를 비롯해 많은 사람이 결핍을 순간의 쾌락으로 메웁니다. 술자리, 유흥, 게임, 자극적인 콘텐츠 등으로요. 이런 자극은 순간은 채워줄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나면 다시 공허해지기 마련입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죠.
많은 사람들이 독서, 음악, 공연, 전시 등에서 문화 소양을 쌓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생각한 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거죠. 이런 문화 활동은 대개 느리고 귀찮고 시간과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걸 필요로 하죠. 그러니 자연히 더 쉽게 재미를 느끼는 것들에 빠져드는 거겠죠.
43살 이전의 제 삶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술자리에서 예술을 논했고,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들었고, 온라인에 출처도 알 수 없는 그림을 탐닉했었죠. 문화생활이라고 말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이었습니다. 어쩌면 그때 사는 게 팍팍했던 것도 스스로 자초한 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순간의 재미만 좇으면 더 풍요로운 삶이 있다는 걸 잊고 삽니다. 더 큰 자극만을 필요로 하죠. 반대로 느려도 내가 충만해지는 게 무엇인지 알고 선택하면 이전과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같지만 다른 인생이 펼쳐지게 되죠.
책을 읽은 지 8년째입니다. 책을 읽은 덕분에 작가로 살게 되었죠. 책을 읽지 않았던 제가 책을 선택한 후부터 180도 다른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나의 겉모습은 변함없지만 내 안을 채우고 있는 건 달라졌죠. 다른 걸 채운 덕분에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고요.
음악을 다시 듣기 시작한 게 5년 전입니다. 대중가요가 아닌 클래식 음악이었죠. 바이올린, 피아노, 첼로, 클라리넷, 콘트라베이스 등 다양한 악기들이 연주하는 음악이죠. 그 나이 될 때까지 전혀 관심 없었던 음악입니다. 듣게 된 계기는 단순했습니다. 글 쓰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기 때문이죠.
잘 듣기 위해 배워야 했다면 애초에 포기했을 겁니다. 배우는 건 뒤로하고 우선 듣기부터 했습니다. 여러 음악을 들어보며 호기심을 잃지 않으려 했죠. 들어야 할 동기가 분명해지니 점점 손이 갔습니다. 그러다 꽂힌 음악이 피아노 협주곡이었죠. 그중에서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에 빠져들었습니다.
매일 아침 출근 전 글 한 편 쓰는 게 목표였습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집중이 필요했죠. 이때 도움을 준 게 피아노 협주곡이었습니다. 듣는 동안 잡생각으로부터 나를 지켜줬습니다. 그때는 수시로 글을 썼고 그때마다 늘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있었습니다. 그렇게 5년 동안 같은 음악을 들어왔습니다.
글을 쓰는 동안 흘려들을 때도 있었고, 글을 쓰다 멈춰 음악에 집중했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같은 곡이라도 언제 어떤 상황에서 듣느냐에 따라 감정이 달랐습니다. 다른 감정을 느낄수록 음악에 더 빠졌습니다. 더 좋은 이어폰을 사는 것도 같은 의미였죠. 욕구는 점점 커져 급기야 공연장에서 직접 듣고 싶어 지기에 이르죠.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홍보글을 읽고 즉흥적으로 결정했습니다. 다행히 약속도 없는 날이었고, 무대 가까운 곳에 빈자리도 하나 있었죠. 결정하고 예약하기까지 10분도 안 걸렸습니다. 그게 5일 전이었죠. 그리고 어제, 50년 걸려 공연장에 도착했습니다.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이 연주됐습니다. 앉은자리에서 피아노 연주자의 손이 보였습니다. 영상으로만 봤던 장면을 공연장에서 직접 봤습니다. 눈을 뗄 수 없었죠. 익숙한 멜로디는 아니었지만, 피아노 연주하는 모습만으로도 심장이 뛰기에 충분했습니다.
50살 인 지금의 저를 만든 두 가지는 책과 음악입니다. 팍팍했던 이전 삶과 다르게 이 두 가지로 인해 풍요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특히 음악은 거창하게 할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지식을 배워야 잘 듣게 되는 것은 맞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얼마든 즐길 수 있습니다. 나의 필요에 의해서라면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죠.
사람마다 삶이 충만해지는 도구는 다양합니다. 무엇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도 없죠. 또 남과 비교할 문제도 아니고요.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빠져들고 내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할 수 있느냐일 것입니다. 일상에서 노력이 결국 인생을 충만하게 사는 요령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여러분에게는 충만해지는 그런 게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