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번의 이직으로 깨달은 한 가지 - 직장생활, 목숨 걸지 말자
직장인의 자질을 평가하는 여러 항목 중 성실함을 빼놓을 수 없다. 성실함은 업무 실적처럼 숫자로 보여 지는 지표가 아니다. 직장 안에서 평소 생활태도를 통해 상대방이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성실함의 기준은 무엇일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정시 출근이라 생각한다. 출근 시간은 자신과의 약속이자 동료사이에 지켜야 할 기본예의이다. 기본을 지키는 노력이 성실함으로 드러나고 자신을 평가받는 척도가 될 거다.
대학 동기의 추천으로 제대로 된 직장을 처음 다니게 되었다. 전공도 다르고, 경력도 없고, 나이까지 많은 나를 기꺼이 받아주었다. 30살에 신입이 된다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일 수 있다. 하지만 그때 나는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제일먼저 30살을 내려놓았다. 같은 사무실에는 나보다 먼저 입사했지만 나이 어린 직원이 3명 있었다. 경험만 놓고 보면 그들보다 뒤쳐져 있었다. 나이를 무기로 위세 부릴 수 없었다. 또 내게 기회를 준 관리과장님의 입장도 생각해야 했다. 신입이지만 신입일 수 없었고, 경력은 없었지만 경력자처럼 보일 수 있는 무언가 필요했다.
현장 사무실은 상암동 이었다. 인천공항을 이용하는 승객들을 원활히 운송하기 위해 인천공항철도가 공사 중 이었고, 지금의 ‘상암DMC 정거장’을 짓는 현장이었다. 집은 성남이었다. 출근 시간은 6시 반이었다. 대중교통 이용이 쉽지 않는 시간이다. 직원 대부분은 자가용으로 출퇴근한다. 지방 거주자가 아닌 이상 숙소 제공도 안 된다. 성남은 지방이 아니라 출퇴근 할 수밖에 없었다. 2005년 말 야반도주로 끝난 사업이 남긴 상처가 여럿 있었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게 카드빚이었다. 월급이 밀려 있어 카드 결제도 못하고 있었다. 또 대출로 샀던 자가용은 연체로 인해 더 이상 내 차가 아니었다. 상황이 이러니 방법은 하나 뿐 이었다. 대중교통이다.
첫 날 첫 출근의 긴장감은 아직 생생하다. 지하철은 5시 20분에 첫차가 있었다. 지하철을 타면 무조건 지각이다. 버스는 한 번에 가는 게 없었다. 강남역에서 갈아타야 했다. 집 앞을 지나는 첫 차가 4시 반에 있었다. 첫 차를 타면 5시 10분 쯤 강남역에 도착하고, 다음 버스를 갈아타고 수색에 도착하면 6시가 조금 넘는다. 수색에 내리면 현장 사무실까지 10분 정도 걸어야 했다. 만약 첫 차를 놓치면 무조건 지각이었다. 첫 차를 타기 위해 4시에 일어났다. 씻고 준비하는 시간을 최대한 줄였다. 버스는 도착하는 시간이 매일 조금씩 다르다. 마음 놓고 타려면 무조건 버스보다 먼저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1월, 새벽 추위는 껴입은 옷이 무색할 만큼 살을 파고들었다. 추위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발을 동동거려도 버스만 제 시간에 도착해 주면 그것 자체가 마음의 안식이요, 내복을 한 벌 더 입은 것과 다름없었다.
현장 식당은 6시부터 식사를 할 수 있게 준비한다. 근로자는 6시면 현장에 도착한다. 제일 먼저 식사를 하고 그 날 작업을 준비한다. 직원들은 6시 반부터 식사한다. 밥 먹는 시간에 얼굴 도장 찍는 게 직원들 사이 정해진 룰이었었다. 출근 첫 날 다행이 지각하지 않았다. 낯선 공간에서 방황하고 있던 나를 이끌고 간 곳이 식당이었다. 그 순간 눈 앞 광경은 지금도 생생하다. 테이블은 사람들로 차 있었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국과 밥으로 몸을 녹이고 빈속을 채우고 있었다. 밤사이 안부를 묻는 사람, 오늘 할 일을 상의하는 사람, 그저 묵묵히 먹는 데 집중하는 사람. 그 틈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몇 가지 반찬에 국과 밥이 내 앞에 놓였다. 첫 출근의 긴장감이 조금은 풀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매일 첫 차를 탔고, 6시 반이면 어김없이 식당에 얼굴을 보였다.
그해 3월 복학했고, 집에서 사무실, 사무실에서 학교(공릉동), 학교에서 집, 다시 회사로 이어진 출퇴근은 6개월 간 이어졌다. 또 매달 받은 월급으로 카드빚을 해결 할 수 있었다. 생활도 조금씩 안정되고 있었고 업무도 많아지기 시작해 좀 더 효율적인 통근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때 6개월 동안 지켜 본 소장님이 유류비를 지원해 줄 테니 중고차라도 사라고 했다. 월급으로 생활이 안정되고 있어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중고차를 샀다. 덕분에 한 시간 더 자고 출근할 수 있게 되었다. 자가용으로 출근해도 6시 반 식사 시간은 꼬박꼬박 지켰다. 1월에 시작된 계약직은 성실함을 인정받아 11개월 만에 정규직으로 보상받게 되었다.
새로운 직장을 갖게 될 때 누구나 겪게 되는 통과의례가 있다고 생각한다. 신입은 신입대로, 경력자는 경력자대로 기대하는 부분이 다르다. 신입에게 경력자의 역량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고, 경력자에겐 신입의 패기를 기대하지 않을 거다. 그래도 한 가지 공통적으로 갖춰야 할 역량은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성실함이다. 신입의 성실함은 다양한 업무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고, 경력자의 성실함은 경험을 신뢰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성실함은 짧은 시간 안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시간이 무한정 주어지지도 않는다. 자신의 노력에 따라 기회도, 신뢰도 빠른 시간 안에 가질 수 있게 된다. 나는 전공도 다르고 실무 경력도 부족했다. 이런 나를 뽑은 건 특별한 역할을 기대하기보다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두고 보겠다는 의미가 더 클 거다. 그래서 나는 성실함을 보여주기로 했다. 정해진 시간에 늦지 않고 출근하는 게 신입의 패기일 수 있고, 검증되지 않은 경력을 조금이나 신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