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
2022. 11. 06. 06:32
최종 면접까지 올라갔다. 나란히 앉은 다섯 명중 내가 가장 나이가 많아 보였다. 이 중에 누군가 떨어트린다면 내가 될 것 같았다. 결과는 모르니 일단 면접에 집중했다. 면접관은 두 명이었다. 자신을 구매 팀장이라고 소개했고 옆 자리에 기술본부 총괄 전무를 소개했다. 공통 질문 이후 한 사람씩 지목하며 기술적인 내용을 물었다. 경력직을 뽑는 자리였지만 경력자 다운 대답이 안 나왔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렴풋이 알고 있는 내용이라 시원하게 대답 못했다. 잘 알지 못하는 내용을 말하려니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입에서 옹알거리니 팀장이 재차 묻는다. "또박또박 말해 주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누가 더 큰소리로 말할 수 있을까. 가뜩이나 어려운 자리, 그런 말까지 들으니 더 말이 안 나온다. 쥐어짜듯 몇 마디 했고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억에 없다. 팀장은 손밑 종이에 뭐라고 적는 것 같았다. 아마 '대답을 잘 못함, 전문 지식이 부족함'뭐 이런 내용이지 않았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물었지만 모두 입을 닫았다. 면접은 그렇게 끝났다. 이틀 뒤 합격 통보 문자를 받았다. 1년을 준비한 끝에 드디어 바라는 회사, 원하는 직무에 발을 들이는 순간이었다.
구매 업무를 제대로 배우지 않았지만 매력은 알았다. 단순하게 물건을 사는 데 그치지 않는다. 공사 진행에 따라 공급 시기를 조절하고, 설계도에 재료 선택이 잘못된 경우 적합한 자재로 대체할 수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싸고 질 좋은 제품을 공급하는 거래처를 확보하는 게 역량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자재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사람을 상대하는 능력도 필요하다. 나는 그런 면에 탁월한 역량은 없었다. 그동안 경험에서 흥미를 발견했고 다른 업무보다는 그나마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수인계 동안 맛을 본 업무도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구매해야 할 품목이 더 다양해지고 결재를 받아야 할 상사가 많아졌다는 점이다. 매일 해야 하는 업무는 단조로웠다. 현장에서 필요한 자재 구매 요청을 받으면 관련 업체 세 곳에 견적을 받는다. 제출된 견적서 중 금액이 가장 낮은 업체와 가격 협상 후 납품 단가를 결정한다. 가격과 거래 조건을 결정지으면 납품은 현장 담당자가 발주하는 식이다. 나는 결정된 금액으로 기안서를 꾸며 팀장을 시작으로 회장까지 결재를 받는다. 어느 기안도 단번에 최종 결재까지 받은 적이 없다. 그러나 팀장의 결재를 받으면 다음 결재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아마도 이 조직은 팀장을 신뢰하는 것 같다. 그러니 언제나 걸림돌은 팀장이었다.
나와 동료는 벽을 향해 앉고 팀장은 우리 옆모습을 지켜보는 위치에 있다. 책상에 앉은 팀장은 우리를 감시하는 CCTV다. 팀장은 우리의 행동은 물론 대화 내용도 흘려듣지 않는다. 자신의 업무도 바쁠 텐데 넘치는 애정(?) 탓에 지나칠 정도로 관심을 표현한다. 그의 관심은 이런 식이다. 거래처와 흥정하는 대화를 듣고 있다가 전화를 끊으면 "너는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해"라는 식이다. 솔직히 나도 대화 중에 아차 싶었던 걸 놓치지 않고 잡아낸다. 지적하는 게 틀린 건 없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굳이 잘했니 못했니 따지며 지적을 받아야 하는지 싶다. 아마도 넘치는 애정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 같다. 솔직히 이 정도는 애교다. 문제는 기안 결재를 받을 때다. 서류에서 꼬투리 하나라도 잡히면 기다렸다는 듯 퍼붓기 시작한다. 마치 그 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제품 사양은 기본이고 시공 방법, 단가 변동 추이, 공급 가능 일자, 대안 제품까지 상상을 뛰어넘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10여 곳의 현장에서 한 가지 자재만 요청해도 30곳의 견적을 받고 협상을 해야 한다. 어떤 날은 오전 내내 전화기만 붙잡고 입에서 단내가 날정도 말을 한다. 그러는 와중에 부수적인 정보까지 입력을 한다는 건 집에 가지 말라는 압묵적인 지시다. 물론 자재 담당자가 알아야 하는 내용인 건 맞다. 나도 언제가 저 자리에 앉았을 때 후임을 가르치려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들이다. 옳은 걸 알면서도 기분이 나쁜 건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다. 옳은 말도 좋은 감정으로 말할 때와 질책하듯 쏟아낼 때는 분명 다르다. 경력직으로 입사하기는 했지만 몇 주 동안 경험한 이런 식의 업무 분위기에는 쉽게 적응되지 않았다.
출근하고 자리에 앉으니 ㅇㅇ현장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3주 전에 요청한 자재를 발주해야 하는데 기안을 받았는지 묻는다. 3주 전이라고 하면 내가 입사하기 전이었다. 일단 알아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당장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퇴사한 전임자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전화로 물어보니 대충 설명을 해준다. 나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전임자도 설계부에 의견을 물어놓은 상태였고 회신을 기다리다 퇴사하게 된 것이었다. 전해 들은 내용을 갖고 설계부 담당자에게 물었다. 담당자도 확답을 못 준다. 오늘 당장 자재를 발주해야 한다는 데 난감하다. 하는 수 없이 팀장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이건 김 대리가 인수인계받았으니 책임지고 처리해." 누가 그걸 모르냐고, 가만 보면 팀장 말투는 정이 안 간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데 굳이 그렇게 네 일 내 일 선을 그어야 하는 건지. 나도 인수인계받은 터라 전후 사정도 명확하지 않고, 그렇다고 내 마음대로 기안을 올릴 수도 없었다. 현장에서는 한시가 급하다고 수시로 전화를 해대는 데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렇다고 팀장에게 같은 말을 또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한 마디로 진퇴양난이었다.
하루가 지났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나도 애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다른 일만 하고 있다. 현장에서 급하면 다른 방법이나 다른 부서를 통해 다시 연락을 해오겠지 싶었다. 그때면 팀장도 어쩔 수 없이 나서서 해결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일말의 기대는 무참히 깨져버렸다. 팀장이 나를 찾는다. 먼저 부르는 경우는 무조건 좋지 않은 일이라는 의미다. 아니나 다를까 손을 놓고 있던 그 일로 불렀다. "김 대리, 대리 맞아? 무슨 일을 그렇게 처리해. 네 일이면 책임지고 처리해야 할거 아니야. 지금 현장에서 자재 안 보내준다고 난리인데 어떻게 책임질 거야?" 듣고만 있지 않았다. "저도 심각한 걸 알고 팀장님께 물었는데 내 일이니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알아봐도 제 힘으로는 해결이 안 돼서 일단 급한 일부터 하고 있었습니다." 보통은 이런 경우 아무 말 못 하는 게 내 성격이다. 윗사람이 화를 내면 나는 손부터 떨린다. 모든 잘못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해서다. 내가 무능해서 일을 키웠다고, 그러니 모든 책임이 나에게 있다고만 여긴다. 아무 말 못 하고 가만히 당했던 게 예전의 나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왠지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뒷 일은 나도 모르겠다.
모든 업무를 FM대로 처리하는 팀장에게 내 태도는 이해되지 않았나 보다. 나에게 더는 지시하지도 묻지도 않고 알아서 해결했다. 더 이상 현장에서 연락 오지 않았다. 말을 함부로 한 것 같기도 하고, 내 일을 떠넘긴 것 같아 미안했지만,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사과에는 익숙지 않아서 눈치만 봤다. 내 딴에도 서운한 감정이 있었으니 나 혼자만 퉁치는 걸로 마무리했다. 팀장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중요하지 않다. 그날 퇴근길에 옆 부서와 회식을 했다. 한 공간에 일하면서 새 사람이 들어왔는데 환영식은 해야 하지 않겠냐며 옆 부서 공무팀장이 자리를 마련했다. 전해 듣기로 공무팀장은 구매팀장과 정반대 성향이라고 했다. 농담도 자주 하고 심각한 표정도 덜 짓고 무엇보다 여유로운 FM이라고 한다. 그러니 그 부서는 늘 대화가 오가고 웃는 소리도 간간이 들렸다. 일하는 중간중간 그런 모습을 보면 내가 저기 있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회식 메뉴는 오리고기였다. 나는 오리 고기를 안 좋아한다. 가뜩이나 팀장과 술을 마시는 것도 처음이고 엊그제 그 일이 있고 난 뒤라 얼굴 보는 게 불편했다. 그렇다고 안 갈 수 없는 자리이니 조커 얼굴에서 볼 수 있는 어색한 웃을 지으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팀장은 한결같은 사람이다. 업무 중에도 일과 관련된 대화 외에는 하는 법이 없다. 술자리에서 일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우리에게도 딱히 할 말이 없나 보다. 술을 따라주지도 많이 먹으라는 말도 없다. 오히려 공무팀장이 우리를 챙겼다. 그런 팀장의 태도는 우리를 제외한 나머지에게 익숙한 듯했다. 누군가 구매 팀장은 부하직원을 강하게 키운다며 너슬 레를 떤다. 직접 경험해보니 강하게 키운 것인지 관심이 없는 건지 애매했다. 공무팀장이 따라주는 맥주를 받아 마셨다. 공무팀 동료가 구워주는 오리고기를 받아먹었다. 그러는 사이 팀장은 공무팀과 제법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주고받는다. 웃기도 한다. 두 달 동안 한 공간에 있으면서 웃는 모습을 못 봤다. 어느 모습이 진짜인지 궁금하다. 처세를 잘하는 직장인은 대게 두 가지 모습이 공존한다. 상대방이 아무리 싫어도 싫은 티를 내지 않는 게 처세라고 배웠는데 팀장은 예외인가 보다. 정말 우리를 싫어해서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건지, 함께한 시간이 짦아서 아직 어색해서인지 가늠이 안 간다.
처음이라 실수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맥주를 마셨다. 나도 술이라면 빼지 않는 성격이지만 불편한 사람과 마시려니 마음껏 마시면 안 될 것 같았다. 팀장은 소주를 마신다. 남자는 술자리에서 친해진다고들 한다. 평소 지지고 볶아도 술자리에서 만큼은 다 잊고 부어라 마셔라 하며 정을 쌓는다. 팀장도 그런 걸 할 줄 아는 사람인지 궁금했다. 그렇다고 소주잔을 들고 옆 자리에 앉는 건 내 성격이 아니다. 혹시 부르면 마지못해 앉기는 해도 먼저 다가가는 걸 할 줄 모른다. 테이블 가장자리에서 멀뚱이 앉아 맥주잔만 만지작거렸다. 시간만 흘렀다. 술기운이 오르지도, 오리고기로 배를 채우지도 않았다. 내가 나를 봐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나 마찬가지였다. 화기애애하게 소주잔을 기울이던 팀장과 눈이 마주쳤다. 팀장은 아니라고 하겠지만 내가 느끼기에 그때서야 내가 같은 자리에 남아 있다는 걸 알아챈 눈치였다. 술기운이 올라서인지 한 두 번 눈을 마주쳤다. 그렇다고 딱히 술을 따라준다거나 고기를 많이 먹으라는 말을 하지는 않는다. 눈빛만 마주친다. 어쩌면 나에게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평소라면 그냥 넘길 수도 있을 말이지만 그 자리, 그 상황이었기 때문인지 나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
"김대리는 적응하려면 아직 멀었다. 어디서 어떻게 일을 배웠는지 모르겠지만 역량이 많이 부족해." 나에게 대놓고 한 말이 아니다. 공무팀장에게 하는 말이 나에게 들렸다. 그 말에는 엊그제 있었던 일을 처리하는 내 태도에 대해 실망했다는 말 같았다. 그거라면 나도 할 말이 많았다. 술기운을 빌리지 않은 채로 하고 싶은 말이 튀어나왔다.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라고 그러고 싶었겠습니까? 입사 한지 한 달도 안 됐고 전임자도 처리하지 못한 일이었고 팀장님도 알고 있는 일이라면 먼저 해결해 줄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굳이 너 한 번 엿 먹어봐라는 식으로 그렇게 뒷짐 지고 있는 게 상사입니까? 그건 강하게 키우는 게 아니라 방관하는 거 아닌가요?" 끝까지 또박또박 말했다. 그동안 나도 나름 쌓인 게 많았다. 시시콜콜하게 간섭하는 게 불편했다. 경력직이면 어느 정도 대우를 해주는 게 예의인데 팀장은 그런 게 없었다. 오로지 자신이 정한 기준에 못 미치면 '능력 부족'이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6개월, 1년을 두고 본 뒤 평가를 받았다면 나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이제 한 달도 안 됐는데 나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렇게 단정 짓듯 말을 하는지 싶었다. 할 말만 하고 자리를 나왔다. 누구 하나 붙잡지 않았다. 자리가 어떻게 마무리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운전을 대리기사에 맡기고 뒷자리에 앉았다. 내일 얼굴 볼 수 있을까?
표정만 봐도 무슨 일 있구나 짐작 갔지만 아내는 묻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도 같은 시간에 출근했다. 운전하는 내내 생각했다. 이대로 출근하는 게 맞나? 팀장 반응은 어떨까? 그냥 술자리 치기로 끝낼까? 아니면 뒤끝 작렬, 한바탕 쏘아붙이려나? 오만가지 생각이 스친다. 이정표가 유혹의 손길을 보낸다. 핸들만 돌리면 회사에서 멀어질 수 있다. 안 그래도 오래 다닐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매일 고개를 들었다. 아니라고 외면했지만 하루하루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정을 붙여보려고 나름 노력했지만 정을 붙일 대상이 없었다. 핑계가 핑계를 낳으면서 앞으로 어떤 결정을 내려도 내 탓은 아니라고 다짐했고, 그렇게 결국 핸들을 돌렸다. 출근 시간이 지나자 연락이 왔다. 받지 않았다. 두어 번 전화가 온 뒤 문자가 왔다. 팀장이었다. '그만두려면 정식 절차를 밟으세요.' 그럼 그렇지 뭘 기대했어. 이래야 팀장이지.
핸들을 돌리지 말았어야 했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순간이 가장 후회된다. 아무 말도 없이 잠수 탔던 내 행동을 반성한다. 팀장이 내 성격과 안 맞는 건 개인적인 문제다. 일에 있어서 그의 지시와 지적은 다른 게 없었다. 그는 직장인이 갖춰야 할 기본을 바랐다. 경력이 많건 적건 업무에 기본은 다르지 않다. 나는 기본기가 부족했다. 편법을 먼저 배웠던 것 같다. 편한 방법을 먼저 배우고 익힌 탓에 당연한 기본기를 받아들이기 불편했다. 만약 그때 팀장의 업무 스타일을 보고 배웠다면 조금은 다른 역량을 갖게 될을 수도 있다. 십여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비슷한 실수를 반복한다. 그때 성질을 죽이고 죽은 듯 제대로 배웠다면 적어도 기본기는 갖추었을 텐데 말이다. 술을 진하게 마신 날이면 팀장의 무표정한 얼굴이 떠오른다. 그 표정 뒤에는 아마 늦더라도 정도를 걷을 수 있는 역량을 갖길 바라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술기운을 빌려 문자를 남겼다. '여전하시죠, 그 표정.'
2022. 11.06. 1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