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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급 루팡 = 갑질 동료

by 김형준

2022. 11. 07. 07:07




농구 경기에서 식스맨이 주전을 대신해 활약을 펼치기도 한다. 식스맨은 주전 선수 다섯 명 중 부상 등으로 경기가 어려울 때 대신 뛰는 선수를 말한다. 주전 선수는 식스맨 덕분에 경기에 집중할 수 있고 만에 하나 생길 수 있는 부상에도 적절한 조처를 받을 수 있다. 이들의 존재는 승리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직장 내도 식스맨이 존재한다. 농구 경기의 식스맨과는 의미가 조금 다르다. 다른 동료의 일을 대신하기는 하지만 표가 나지 않는다. 때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경우도 더러 있다. 제 역할을 못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는 동료 덕분(?)에 오롯이 일을 떠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어떤 자리에 있는지에 따라 그 사람이 빛 날수도, 초라해질 수도 있다. 아니면 돌아버리기도 한다. 내 자리가 그랬다. 온갖 뒤처리를 다 맡기는 그런 자리였다. 공사 수주에는 열을 올리면서 수금은 나몰라 하는 영업 이사 때문에 두 배 세 배로 업무가 많았다. 영업 이사는 수주는 물론 수금까지 책임지는 게 업무 범위이다. 물론 조직이 크고 세분화되어 있으면 역할도 달라지겠지만 내가 다닌 회사는 그만큼 큰 곳이 아니었다. 그러니 수주한 영업 이사는 일이 끝날 때까지 수금을 챙겨야 했다.


월말이면 전화기를 꺼놓고 싶었다. 일은 했는데 돈을 못 받았다는 전화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내가 돈을 안 준 것도 아닌데 내가 전화를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나에게 돈을 달라고 아우성이다. 정작 이런 전화를 받아야 하는 담당자는 따로 있는데 말이다. 먼저 건설사의 역할 분담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영업 담당자는 공사 수주를 담당한다. 수주한 공사는 공사 담당자가 시공을 한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본사 관리자는 현장에서 발생한 각종 비용을 정리해 해당 근로자나 업체에 지급한다. 이때 공사를 맡긴 곳에서 먼저 공사비를 받아야 거래처에도 돈을 지급할 수 있다. 만약 공사를 맡긴 곳에서 돈을 못 주면 건설사가 우선 지급하고 나중에 받기도 하지만 영세한 건설사(내가 다녔던 대부분의 회사)는 그럴만한 여력이 없다. 그래서 수금이 되는 만큼 돈을 내보내는 게 원칙이다. 이 말은 영업 이사가 돈을 받아오지 못하면 거래처에 돈이 못 나가고, 돈을 받지 못한 근로자나 거래처는 애먼 나를 찾으면 불편한 상황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현장에서 발생한 비용 대부분이 내손을 거쳐 정리된다. 나도 현장에서 어떤 일을 하고 얼마나 비용이 발생하고 얼마가 수금되는지 파악하고 있는다. 그렇다고 내가 돈을 받아내는 역할까지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앞서 말한 대로 영업 이사가 수금을 책임져줘야 나도 내 역할을 하며 원활하게 돈이 돌게 된다. 하지만 영업 이사가 제 역할을 못했기에 내가 떠안게 되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더 심각한 건 내가 피해를 당하는 걸 알면서도 책임 있는 누군가가 나서서 고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표도 영업 이사에게 수금 문제에 대해 책임 지라는 말을 안 한다. 그렇다고 양질의 공사를 다량으로 수주하는 것도 아니다. 그가 수주한 공사 대부분이 일을 할수록 손해만 보는 남들이 안 하려는 일만 가져왔다. 나름의 고충은 짐작한다. 하지만 책임감이 있었다면 그렇게 두 손 놓고 있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런 행태에 직장을 다니는 내내 이어졌다. 당장 그만두지 못하니 오롯이 내가 떠안고 두 배 세 배로 일을 해야 했다.


일손이 부족할 때 돕는 게 인지상정이다. 돕는다는 걸 티 내지 않아도 언젠가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 전제에는 각자가 제 역할을 해냈을 때이다. 내가 일에 치일 때 동료의 도움을 받고, 동료가 바쁠 때 내가 돕기도 하면서 조직은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제 역할도 못하는 한 사람 때문에 다른 누군가가 피해를 당한다면 건강한 조직이라고 할 수없다. 식스맨도 주전 못지않게 경기력을 유지해야 한다. 직장인도 자신이 맡은 업무 역량을 우선으로 키워야 한다. 그래야 자신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남이 만든 빈자리를 대신하려고 내 역할을 소홀히 하게 된다면 언젠가 한쪽으로 기울게 된다. 주어진 역할을 못하는 직장인을 속된 말로 '월급 루팡'이라고 한다. 월급 루팡은 월급만 챙기는 게 아니라 옆 자리 동료의 등골도 휘게 한다는 걸 알았으면 한다. 제 역할을 못하는 구멍 같은 동료, 어쩌면 구멍을 메우는 동료에겐 다른 형태의 갑질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2022. 11. 07.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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