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를 보면 분노를 유발하는 사건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얼마 전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50대 경비원이 주민 A 씨에게 지속적인 폭행과 폭언에 시달려 ‘억울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사건의 발단은 경비원이 주차공간을 만들려고 가해자의 차량을 옮기는 데서 시작되었다. 경비원의 모습을 본 A 씨는 이유 없이 경비원을 폭행했고 이후에도 여러 차례 “머슴 주제에!”란 폭언과 함께 폭행을 일삼았다. 심지어 CCTV가 없는 경비실 내부 화장실에 피해자를 가둬놓고 코뼈가 부러지도록 폭행하기도 했다. 평소에 성실히 일하고 주민들에게 친절했던 경비원이 폭행당한 모습을 본 입주민들은 합심해 A 씨를 고소했다. 그러나 A 씨는 도리어 경비원을 명예훼손으로 맞고소했고 괴롭힘도 멈추지 않았다. 경비원에게는 두 명의 딸까지 있었지만 결국 심리적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렸다. 이 기사를 접한 수많은 네티즌이 분노의 댓글을 달았음은 물론이다.
나와는 무관한 일에도 우리는 곧잘 분노한다. 그런데 실제로 만나는 사람이 분노유발자라면 참아내기가 참으로 힘들 것이다. 종종 ‘진상 보존의 법칙’이란 말이 회자된다. 직장에서 지속적으로 몰상식하게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어 그만두고 이직을 했다. 새로운 근무처에서 마음잡고 열심히 일해보려는데 이전 직장의 캐릭터와 비슷한 사람이 또 있다. 이번에는 이를 악물고 참고 버텼다. 고맙게도 얼마 뒤 그 사람이 직장을 그만두었다. 이제는 괜찮겠지 했는데 비슷한 부류의 사람이 새로 들어와 또 나를 괴롭힌다. 어떤 물질이 화학반응을 거쳐 다른 물질로 변화해도 물체의 질량은 항상 보존된다는 ‘질량 보존의 법칙’처럼, 어디를 가나 진상은 같은 비율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 진상 보존의 법칙이다.
진상을 만나면 너무나 괴롭다. ‘원증회고(怨憎會苦)’란 말이 있다. 원망하고 증오하는 자와 만나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는 뜻이다. 그저 얼굴만 봐도, 목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두근거리고 식욕이 사라지게 하는 사람이 있다. 직장 상사, 선후배, 동기, 친구 심지어 가족까지 다양한 인간관계에서 나이 불문하고 많은 사람이 대인관계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자살 방지를 위해 한강 다리에 설치된 ‘SOS 생명의 전화’ 상담 데이터를 분석해보니 2011년부터 2020년까지 자살 상담 전화 8,113건 중 ‘대인관계 관련 상담’이 2,208건으로 가장 많았다. 또한 2019년 자살 시도자 2만 1,54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자살 동기 중 ‘대인관계 스트레스’가 ‘정신적 문제’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나 역시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왔다. 정당한 이유 없이 상습적으로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사람과의 싸움은 주로 생각 속에서만 일어난다. ‘나는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도대체 왜 저러는 거지. 또 소리 지르거나 막말하면 맞받아쳐야겠다’란 생각을 현실에서는 실천하기가 힘들다. 만약 친구와 싸우게 되면 인연을 끊어야 할 수도 있고, 직장 상사와 싸우면 사표를 낼 각오를 해야 하는 탓이다. 분노를 유발하는 사람은 쉬는 날에도 머릿속에 불현듯 나타나 나를 괴롭힌다. ‘왜 자꾸 이 소중한 시간에 내 머릿속에 나타나는 거야. 그냥 잊자. 아예 생각을 말자’라고 다짐해도 생각 속 전투는 쉬 끝나지 않는다.
특히 분노유발자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는 24시간 동안 함께 붙어 있어야 하는 경우다. 출퇴근하면 집에서나마 잠시 떨어져 쉴 수 있지만 군대처럼 합숙생활을 할 때는 긴장감을 풀 시간이 없다. 집이라는 곳 또한 마찬가지다. 누구보다 서로 아끼고 사랑해야 할 가족 구성원도 분노를 유발하는 자가 될 수 있다. 나와 친한 동생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
동생은 초등학교 때 엄마를 여의고 아빠와 단둘이 살았다. 아빠는 거의 매일 술을 먹고 매일 밤 동생을 괴롭혔다. 새벽 2시까지 초등생 자식을 앉혀놓고 훈계하거나 잠을 자야 할 시간에 수시로 친구들을 데리고 와 떠들며 술을 마셨다. 이유 없이 때리는 날도 많았다. 요즘 들어서야 아동학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당시에는 부모가 자식을 때리는 게 흔한 일이었다. 괴롭힘이 너무 심한 날이면 동생은 밤늦은 시간에 집 밖에 나가 아빠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집에 들어가기도 했다. 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의 괴롭힘을 견뎌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증오를 품은 채 입대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살펴볼 것이 있다. 우리는 왜 분노를 느끼는 걸까. 한 연구에 따르면 분노는 ‘사건 발생 → 1차 평가 → 2차 평가 → 분노’의 인지적 과정을 따른다. 분노를 유발하는 사건이 일어나면 우리 내면에서는 ‘나를 위협하는 건가’ 혹은 ‘나를 우습게 보는 건가’와 같이 의미를 부여하는 ‘1차 평가’가 일어난다. 뒤이어 ‘나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 ‘억울하다’ ‘저 사람을 응징해야 한다’라는 해석이 일어나는 ‘2차 평가’가 발생한다. 이 두 번의 평가가 끝나면 분노라는 감정이 발생한다.
1차 평가는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발생하는 것으로 불편감이나 불쾌함처럼 비교적 강도가 약하다. 다시 말해 어떤 욕을 들었을 때는 일단 그것이 욕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인상을 찡그릴 뿐이며, 뒤이은 2차 평가에서 본격적인 해석이 이루어진다. ‘나는 잘못이 없고, 저 사람의 행위는 비상식적이며, 나는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했다’라는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온다. 짐작하겠지만 이 두 번째 평가를 통해 강도가 강해지고 감정이 증폭되어 분노 혹은 격노하게 된다.
인간에게는 이성과 감정이라는 대표적인 두 가지 마음작용이 있다. 이성은 차갑고 논리적이다. 나에게 전달되는 외부 정보를 내면의 정보를 통해 분석하기만 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나에게 ‘열여덟’이라는 숫자가 담긴 말을 했다. 내 귀를 통해 ‘열여덟’이라는 숫자가 뇌로 전해지고 정보를 분석한다. 전달된 말이 특정 숫자이고 한국어로 그 숫자가 욕이라는 해석이 일어난다. 이성의 역할은 여기까지가 끝이다. 그러나 이후 내면에서는 감정의 영역이 작동한다. 만약 숫자가 들어간 한국어 욕을 외국에 나가 현지인에게 한다면 상대방은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고 그저 어리둥절해할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는 이성과 감정이라는 구분되는 마음작용이 있기 때문에 어떤 언어나 몸짓이 전달되면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분석, 상황과 인물에 따른 해석, 그리고 감정이 일어나면서 기쁨 또는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다.
분노가 일어나는 과정을 깨닫고 분노를 조절할 힘을 얻게 되면 삶에서 우리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하나의 요소를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분노유발자와 맞닥뜨리게 되면 내면을 통제하기가 쉽지 않다. 분노유발자에 대한 보다 현실적인 해결책은 없을까.
만약 직장 선후배나 친구 중의 분노유발자가 폭언이나 성희롱 같은 범죄를 저지른다면 증거를 수집해 법적 처벌을 받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욕이나 희롱을 하지는 않지만 원칙, 예의, 의리를 들먹이거나 필요 이상의 업무를 부과하며 교묘하게 괴롭히는 경우다. 만약 계속해서 마주하는 사람 때문에 괴롭다면 그 사람과 관계를 끝내는 것이 확실한 해결책이다. 물론 인연을 끊기란 쉽지 않다. 만약 친구 사이라면 다른 친구들과의 관계 때문에 불편해질 수도 있다. 또 가족 중 누군가와의 절연은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기 마련이다. 따라서 결별을 선택하는 것은 다소 극단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보다 좀 더 순화된 방법은 당사자에게 예의를 갖추고 침착하게 내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다. 물론 얼굴만 봐도 심장이 뛰고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 사람과 차분하게 대화를 하기는 참 어렵다. 그러나 그 사람 때문에 삶이 너무나 고통스럽다면 그래도 도전해봐야 한다. 계속해서 참기만 하면 분노유발자는 자신의 행위가 나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을 더욱 만만하게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인간의 인내력에는 한계가 있다. 인내의 벽이 무너지면 자기 자신이나 타인에게 더 큰 후회를 남길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와 같이 해도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까. 그렇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그 사람과 결별했을 때 나에게 일어날 피해를 감수하든지, 혹은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나에게 일어날 피해를 감내하든지.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나를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지, 어떤 선택이 나를 편안하게 해줄지 선택해야 할 것이다.
사실 생계가 달린 직장을 뛰쳐나오거나 유일한 피난처인 가족과 친구의 품을 떨쳐버리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다. 몇 번이나 사직서를 내야 하나 고민해도 어느 순간 가족들을 생각하면 ‘조금만 더 참아보자. 조금만 더’란 생각으로 스트레스를 집어삼킨다.
보다 근원적인 해결책은 용서와 화해다. 이 중에서 화해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필요하며 말처럼 수월하지도 않다. 반면에 용서는 나 혼자서도 가능하며 내 의지에 따라 성사될 수 있다. 분노유발자를 용서할 마음이 쉽사리 들지 않는다면 먼저 그 사람의 죽음을 떠올려보면 좋다. 구체적으로는 나를 괴롭혔던 사람이 ‘영정사진’에 담긴 모습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이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고인에게 인사하기 위해 장례식장에 들어갔다. 향이 피우는 연기가 드리운 공간에 그 사람의 생전 모습이 담긴 영정사진이 놓여 있다. 이때 내 내면에서는 과연 어떤 감정이 올라올까.
지금 제안한 방법은 사실 내가 직접 적용해본 방법이다. 예전에 지속적으로 나에게 스트레스를 주던 사람이 있었다. 스트레스가 심해 한동안 불면증을 겪었고 평일이든 주말이든 상상 속에서 그와 온갖 전투를 벌였다. ‘똑같이 폭언을 퍼부어줄까?’ ‘서류를 던지고 이 자리에서 나가버릴까?’ 갖가지 상상은 곧 저 사람이 몹쓸 병에 걸려 죽거나 길을 가다 사고나 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뻗어갔다. 그러다 보니 내 마음은 어느새 그 사람의 장례식장에 가 있었다. 나는 검은색 정장을 갖추어 입고 나를 괴롭히던 얼굴 앞에서 향을 올리고 절을 했다. 그런데 의외였다. 나는 그 순간 문득 내 마음속에서 분노가 수그러진 느낌을 받았다.
물론 내가 느낀 분노가 한 번에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현실에서 다시 그를 만나자마자 다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기억 속 장례식장을 떠올렸다. 여러 번 이 과정을 반복하면서 분노유발자의 영정사진을 떠올리니 내면에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화가 조금씩 누그러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앞서 말한 동생은 술에 취할 때마다 “엄마가 먼저 떠나지 말고 아빠가 먼저 갔으면……. 엄마가 보고 싶어”란 말을 자주 했다. 세월이 흐르고 어느 날 동생에게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장례식장에 가서 영정사진에 담긴 동생의 아버지를 보았고 빈소를 함께 지켰다.
이제 동생은 서른 살이 넘었다. 요즘도 가끔 만나곤 하는데 최근 들어서 동생이 이런 고백을 했다. “형한테 자주 했던 말 있잖아. 엄마 대신에 아빠를 먼저 데리고 갔어야 했다는 말. 내가 잘못 말한 것 같아.” 나는 궁금해졌다. 엄마의 죽음과 아버지의 죽음 중 어느 쪽이 더 슬프냐고. 내 물음에 동생은 뜻밖의 말을 했다. 아빠가 죽은 게 더 슬프다고. 이유를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이제 서른을 넘겨보니 아버지가 밤마다 왜 술을 먹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이제야 조금이나마 아빠를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아빠가 살아 있을 때 지겹도록 먹던 콩자반과 된장찌개가 그립다고. 한때 철없이 아버지의 죽음을 바랐던 것이 후회된다고.
동생이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지를 그립게 만든 계기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아버지의 빈자리, 아버지의 죽음일 것이다. 만약 동생이 지금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예전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만난다면 얼마나 반갑고 좋을까. 만약 그때 아버지가 언젠가는 죽을 것임을 알았다면, 단 몇 번이라도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렸다면 지금의 후회와 그때의 분노가 조금은 더 가벼워지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