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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현공 Sep 27. 2020

죽음이란 이름의 스승

체감온도라는 말이 있다. 추운 겨울날 외출하기 전에 날씨를 확인하니 영하 5도. 좀 춥겠거니 하고는 집을 나선다. 그러나 막상 밖에 나가 날씨를 ‘체감(體感)’, 말 그대로 몸으로 느껴보니 영하 10도를 밑도는 것만 같다. 매서운 바람과 볕이 들지 않는 그늘이 있기에 피부로 실감하는 온도는 다른 것이다. 체감온도는 생각과 체험에 큰 간격이 있음을 상징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다.

     

‘죽음의 체감’ 또한 체감온도와 비슷할 것이다. 평소에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라는 말을 보고도 무심히 지나칠 뿐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면 그제야 죽음을 체감하게 된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것은 장례식장보다는 3일간의 장례가 끝난 뒤다. 정신 차릴 새도 없이 손님을 맞으며 슬픔을 억눌렀던 3일간의 장례를 마치고 집에 왔을 때 떠나간 사람의 빈자리가 새삼 실감난다. 매일의 삶에서 그가 있었던 자리에 더 이상 그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느낄 때 우리는 죽음을 체감한다.

     

그러나 어쩌면 죽음을 ‘완전히 체감’하는 순간은 나 자신이 직접 죽음과 맞닿을 때일지 모른다. 중병에 걸려 시한부 판정이 내려지거나 불의의 사고를 당해 바로 저 앞에 죽음이 괴로움을 거느리며 나에게 걸어오고 있음을 느낄 때 우리는 죽음을 온전히 실감할 것이다.



알베르 카뮈(Albert Camus)는 “경험은 만들어낼 수 없다. 반드시 겪어야만 한다”라고 말했다. 당해보기 전엔 알 수 없는 것. 죽음도 그런 것일까. 우리가 사랑하는 이를 잃기 전까지는, 자신이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죽음을 말하지 말아야 할까. 우리가 죽음을 알고 경험할 방법은 직접 죽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밖에는 없을까. 그런데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스티브 잡스(Steve Jobs)는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제가 열일곱 살 때 이런 문장을 본 적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올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저는 큰 감명을 받았고 이 구절을 마음에 새기며 매일 아침 거울 속 자신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오늘 내가 하려던 일을 할까?’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나는 머지않아 죽을 것이다’란 사실을 떠올리는 건 나에게 정말 중요한 도구였습니다.”


잡스는 애플(Apple)의 창업주이며 스마트폰 시대를 연 선구자다. 그는 애플을 설립한 뒤 최초의 개인용 PC를 개발해 널리 보급하며 성공 신화를 썼다. 그러나 몇 년 뒤 제품 판매 부진 탓에 10년도 채 안 되어 자신이 만든 회사에서 쫓겨났다. 누구든 무너질 법하건만 잡스는 달랐다.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작은 컴퓨터 그래픽 회사를 인수해서 픽사(Pixar)를 설립했고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Toy Story)〉를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재기에 성공한 잡스는 다시 애플의 최고경영자로 복귀했다. 2007년, 잡스는 손 안의 컴퓨터이자 최초의 보급형 스마트폰 아이폰(i-phone)을 개발해 출시했다.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적자를 거듭하던 애플은 잡스의 복귀 이후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우뚝 섰다.


스마트폰은 21세기의 모든 산업 분야를 혁신했다. 대변혁의 시작은 잡스의 발명품, 아이폰이었다. 그러나 그런 잡스도 죽음에 관해 숙고했다. 잡스는 스탠포드대 연설에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누구도 죽기를 원하지 않지만 죽음은 우리의 숙명입니다. 하지만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입니다. 죽음은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여러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사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아쉽게도 잡스는 췌장암으로 2011년 56세의 나이에 세상과 이별했다. 전 세계가 인류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거인의 죽음에 애도를 표했다. 어쩌면 잡스가 전무후무한 업적을 남긴 힘의 원천은 바로 그가 평소 죽음을 가까이했다는 데 있을지도 모르겠다. 죽음은 그를 움직인 동력이었다. 그렇다면 죽음에 다다른 막바지가 아니라 평소 일상에서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는 것이 우리에게도 도움이 될까.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갈 힘을 얻었던 건 오직 잡스만이 가졌던 특별한 능력이었을까.        


5세기경 실론(Ceylon, 현 스리랑카)의 위대한 성인이었던 붓다고사(Buddhaghoṣa)는 《청정도론》을 썼다. 이 책은 죽음에 대한 사색이 우리에게 유익한 결과를 가져다줄 것이라 말한다.


“죽음을 사색하는 자는 깨어 있는 의식을 가지게 될 것이며 내면의 방일함은 제거될 것이다. 그는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을 싫어하게 될 것이다.”  

“죽음에 대한 성찰은 선악을 명확히 구분하는 능력을 주며, 재물에 대한 집착심을 버리게 한다.”

“평소 죽음을 사색하지 않은 자는 죽을 때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러나 죽   음을 사색한 자는 두려움이나 공포 없이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흥미롭게도 현대의 공포 관리 이론(Terror Management Theory) 실험을 통해 입증한 내용은 5세기에 쓰여진 《청정도론》에서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공포 관리 이론은 인간이 죽음을 생각했을 때 일어나는 심리를 탐구하는 학문, 일종의 죽음심리학이다). 이를테면 《청정도론》에서는 죽음을 사색하는 것이 의식을 깨어 있게 하며 방일한 태도(나태하고 무기력한 상태)를 제거한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해 공포 관리 이론은 자신의 죽음을 떠올린 사람은 ‘제한적 시간관(limited-time perspective)’을 갖게 되며 내 삶에서 남은 시간이 정해졌다는 사실을 각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청정도론》에서는 죽음을 사색하면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을 싫어하게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란 돈, 외모, 인기 같은 삶의 외적인 요소다. 공포 관리 이론은 실험을 통해 이를 증명했다. 실험 참가자들은 삶의 외적인 요소와 내적인 요소의 중요성을 평가한 뒤 죽음과 고통에 대한 질문지를 작성했다. 질문지를 작성하며 죽음에 대해 생각한 참가자들은 삶의 의미, 가족, 사랑, 평화, 행복 등 내면적 요소를 우선순위로 두었다.



“죽음에 대한 성찰은 재물에 집착하는 마음을 버리게 한다”라는 《청정도론》의 말 역시 공포 관리 이론의 ‘스크루지 효과(scrooge effect)’와 비슷하다. ‘스크루지’는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의 소설 《크리스마스의 캐럴》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다. 스크루지는 지독한 구두쇠로 타인에게 동전 한 푼 베푼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꿈속에서 한 유령을 만나고, 유령을 통해 자신이 죽고 난 뒤의 상황을 보게 된다.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은 없었고 오직 비난과 조롱만 난무했다. 꿈에서 깬 스크루지는 자신의 죽음을 자각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산다. 많은 이들에게 가진 것을 베풀기 시작했고 외면했던 사람들과 가까이 지냈다. ‘스크루지 효과’라는 용어는 이 소설에서 연유했다.      


실제로 공포 관리 이론에서는 죽음을 가까이하는 것이 기부에 대한 관심을 증가시켰음을 실험으로 증명했다. 실험에서는 장례식장과 평범한 거리, 이 두 곳의 장소를 정해 자선행에 관한 인터뷰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장례식장에서 인터뷰한 참가자들이 거리에서 인터뷰한 사람들보다 자선행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1,500년 전의 책인 《청정도론》에서 말하는 내용이 현대의 공포 관리 이론과 여러모로 비슷하다는 점은 참으로 흥미롭다. 그러고 보면 죽음학의 선구자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Elisabeth Kübler-Ross)도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죽음을 바라본다. 그녀는 죽음이 우리가 성장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삶의 끝자락에 서 있는 죽음은 고통이나 막다른 길이 아니라 우리를 성장시키는 스승이라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최후에서만 체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삶에서 자주 경험하는 것이다. 직장을 잃거나, 이혼하거나, 사업에 실패하거나, 이사하거나, 졸업하는 등 삶에서 일어나는 큰 변화 속에서 우리는 죽음과 같은 경험을 한다. 삶의 변화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정상적인 일이다. 우리가 만약 죽음을 직시하고 이해할 수 있으면 인생에서 일어나는 큰 변화나 괴로움을 잘 받아들이고 대처해나갈 수 있다.”

-《죽음, 성장의 마지막 단계(Death: The Final Stage of Growth)》     



평범한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시한부 판정을 받거나, 사업에 실패하는 등 삶의 고난에 직면하면 세 가지 반응을 보인다. 첫째는 좌절에 빠져 정신이 삶에서 빠져나가버린 ‘이탈’이며, 둘째는 비참함과 괴로움을 감추고 묻어두려 하는 ‘은폐’ 심리, 셋째는 세상과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둔 ‘개방’적인 상태에 자신을 두는 것이다. 자신에게 닥친 고통 속에서도 누군가의 말에 귀 기울이고 힘든 이에게 손을 내미는 것. 바로 이러한 상태에서 죽음과 삶의 고난에 맞닥뜨린 사람은 그 자신을 ‘성장’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 퀴블러로스의 말처럼 우리는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고 나비가 되듯이 고난과 시련 속에서 끊임없이 죽고 거듭 태어나야 한다”.      


죽음은 우리를 부나 성공 같은 외적인 것과 관계없이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스승이다. 죽음을 가까이하면 인생의 중요한 가치를 각성할 계기를 얻을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에는 죽음을 ‘대비’하는 측면도 있다. 사실 죽음을 미리 떠올리는 것은 전쟁에 참가하기 전의 모의 훈련과 비슷하다. 실제로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 거리로 나가보기 전까지는 밖이 얼마나 추울지 상상하기 힘들다. 아마도 죽음을 미리 가까이하는 것과 실제로 죽음을 겪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참전과 훈련’이란 말의 의미를 떠올려보면 살아 있을 때 죽음을 가까이하는 게 전혀 의미 없는 일은 아니다.     


전쟁을 치르기 전에는 ‘훈련’을 한다. 훈련 상황은 실제 전쟁에 돌입했을 때보다는 실감이 덜 하다. 또 실제로 전쟁을 겪어본 사람들 눈에는 훈련한답시고 입만 떠벌리는 사람의 말이 한심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훈련은 크든 작든 반드시 효과가 있다. 만약 기본적인 총기 훈련도 없이 전쟁 속으로 뛰어든다면 뭘 어떻게 할지 몰라 허둥거리다 허망하게 세상과 하직할 가능성이 더 많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죽음 또한 참전을 위한 훈련과 비슷하다. 나의 죽음과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하거나, 명상하거나, 글로 적어보는 등 우리가 직접 죽음을 체감하기 전 미리 죽음을 가까이하는 것은 일종의 훈련이다. 이 훈련은 사랑하는 사람을 보낸 뒤 우리가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들이 떠나기 전 그들과 남은 삶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를 알려준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죽음 속으로 걸어 들어갈 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지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실제 죽음에 다다르는 순간, 우리는 죽음을 체감하면서 우리가 살아오며 했던 걱정, 우리가 막연히 쫓아왔던 목표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음을 실감할 것이다. 또 우리 곁에 있던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운 존재였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뒤늦기 전에 우리는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얻어야 한다. 죽음이란 이름의 스승에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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