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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관리가 유독 어려운 ADHD를 위한 베티버

"ADHD '시간 감각'의 비밀" 사라진 시간을 찾아서

by 이지현

방금 책상에 앉은 것 같은데 벌써 해가 지고 있거나,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서둘렀지만 어느새 지각을 하고 마는 경험. 시계를 볼 때마다 마치 누군가 시간을 훔쳐 간 것처럼 당혹스러움을 느낄 때가 많다. 분명 열심히 무언가를 하고 있었는데, 하루가 끝나고 나면 정작 해야 할 중요한 일은 손도 대지 못한 채 자책감만 남기도 한다. 우리에게 시간은 흐르는 강물처럼 일정하게 다가오지 않고, 때로는 폭포수처럼 쏟아지거나 때로는 꽉 막힌 호수처럼 멈춰 있는 듯한 변덕스러운 존재로 느껴질 수 있다.

이처럼 시간 관리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단순히 게으르거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닐 수 있다. ADHD 성향을 가진 뇌는 시간을 인식하고 처리하는 방식이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시간맹(Time Blindness)'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눈이 나빠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것처럼, 시간의 흐름이나 길이를 감각적으로 인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현상이다. 남들은 자연스럽게 느끼는 '10분의 길이'나 '1시간의 흐름'이, 우리에게는 막연하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다가올 수 있다.

이 혼란스러운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우리는 아주 특별한 향기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깊은 땅속에서 자라난 식물의 뿌리, 베티버(Vetiver)이다. 베티버의 묵직하고 진한 흙내음은 붕 떠 있는 우리의 의식을 '지금, 여기'라는 현실의 땅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기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우리의 뇌가 왜 시간 앞에서 길을 잃는지 그 과학적인 이유를 살펴보고, 베티버라는 향기로운 닻을 내려 시간의 흐름을 다시 감각하는 '뉴로-아로마테라피'의 세계를 소개해 보려한다.




왜 우리는 시간 앞에서 작아지는가?

'지금' 아니면 '아니오'

ADHD 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시간에 대한 인식이 '현재'에 극도로 집중되어 있다는 점일 수 있다. 우리에게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선이 아니라, 오직 '지금'과 '지금 아님'이라는 두 가지 상태로만 존재할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눈앞에 닥친 흥미로운 일이나 급박한 위기에는 엄청난 몰입을 발휘하지만, '나중'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은 '지금 아님'의 영역으로 분류되어 의식에서 사라지기 쉽다. 미래가 피부로 와닿지 않기 때문에, 마감 직전까지 일을 미루게 되는 것이다.


전두엽의 기능과 시간의 시각화

시간을 관리하고 계획을 세우는 능력은 뇌의 사령탑인 전두엽(Prefrontal Cortex)의 역할과 관련이 깊다. 전두엽은 보이지 않는 시간의 개념을 머릿속에서 시각화하고,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래를 예측하여 현재의 행동을 통제하는 기능을 한다. 하지만 ADHD 성향을 가진 경우, 이 전두엽의 기능이 다소 약하게 작동할 수 있다. 마치 내비게이션 없이 낯선 길을 운전하는 것처럼, 시간의 지도를 머릿속에 그리는 것이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10분 뒤에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의 딴짓을 멈추지 못하게 되곤 한다.


도파민과 시간의 상대성

우리의 뇌는 흥미롭거나 자극적인 활동을 할 때 '도파민'이라는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한다. ADHD 뇌는 도파민 수치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는데, 이는 시간 감각을 왜곡시키는 원인이 된다. 도파민이 팡팡 터지는 재미있는 활동(게임, SNS, 좋아하는 취미)을 할 때는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처럼 느껴지고, 반대로 지루한 과제를 할 때는 시간이 영원히 멈춘 듯 고통스럽게 느껴진다. 이 극심한 시간 감각의 편차 때문에, 우리는 객관적인 시간 배분에 어려움을 겪고 늘 시간에 쫓기는 기분을 느끼게 될 수 있다.




베티버(Vetiver): 흙의 지혜를 담은 '고요의 오일'

땅속 깊이 뿌리내린 힘

베티버는 인도와 스리랑카 등 열대 지역에서 자라는 벼과 식물이다. 잎보다는 땅속 깊이, 때로는 3~4미터까지 뻗어 내려가는 거대하고 복잡한 뿌리에 그 생명력이 응축되어 있다. 에센셜 오일 역시 이 뿌리에서 추출하는데, 그 향기는 비 온 뒤의 젖은 흙냄새, 숲속의 나무뿌리 냄새, 혹은 오래된 서재의 냄새처럼 깊고 묵직하며 스모키하다. 이 향기는 가볍게 휘발되지 않고 오랫동안 머무르는 특성이 있어, 향수에서는 향을 잡아주는 '베이스 노트'로 쓰이다. 이러한 베티버의 특성은 붕 떠 있는 우리의 마음을 단단하게 잡아주는 에너지와 닮아 있다.


신경계를 위한 천연 진정제

인도에서는 베티버를 '고요의 오일(Oil of Tranquility)'이라고 부른다. 베티버의 향기는 과도하게 흥분된 신경계를 진정시키고, 불안과 긴장을 완화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보일 수 있다. 특히 ADHD 성향을 가진 분들이 자주 겪는, 머릿속이 복잡하고 산만한 상태(Mind-chatter)를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베티버의 향을 맡으면 호흡이 깊어지고 심박수가 안정되면서, 뇌가 '전투 모드'에서 '안정 모드'로 전환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지금, 여기'에 머무르는 그라운딩(Grounding) 효과

베티버의 가장 큰 강점은 바로 강력한 '그라운딩(Grounding)' 효과이다. 그라운딩이란 흩어진 의식을 신체 감각으로 되돌려 현실에 발을 붙이게 하는 것을 뜻한다. 시간 관리가 안 될 때 우리의 의식은 과거나 미래, 혹은 공상 속을 헤매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때 베티버의 흙내음은 우리의 주의를 즉각적으로 '지금, 여기'의 감각으로 데려온다. "아, 내가 지금 여기에 있구나. 시간이 흐르고 있구나"라는 현실 감각을 깨워주는 것이다. 이는 시간맹을 극복하고 현재에 집중하게 하는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강력한 힘이 될 수 있다.




아침의 혼돈을 잠재우는 '그라운딩 모닝'

붕 뜬 아침, 현실 감각 깨우기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몽롱한 상태에서 허둥지둥 하루를 시작하면, 온종일 시간에 쫓기는 기분이 들 수 있다. 베티버의 묵직한 향기로 아침의 혼돈을 잠재우고, 차분하게 하루의 리듬을 잡는 것이 목표이다.


추천 향기 조합: 베티버 & 레몬

베티버(Vetiver)가 중심을 잡아주고, 레몬(Lemon)의 상큼함이 뇌를 맑게 깨워준다. 흙과 햇살이 만난 듯한 조화로움이 하루를 안정적이면서도 활기차게 시작하도록 돕는다.


몰입과 산만함 사이, '시간 감각' 되찾기

목표: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며 집중하기

업무나 공부 중에 과도하게 몰입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거나, 반대로 산만해져서 시간을 낭비할 때가 있다. 베티버 향기를 '시간의 이정표'로 활용하여, 주기적으로 현재로 돌아오고 시간의 흐름을 체크하는 것이 목표이다.


추천 향기 조합: 베티버 & 로즈마리

베티버(Vetiver)의 안정감에 로즈마리(Rosemary)의 집중력 강화 효과를 더한다. 로즈마리는 뇌의 혈류를 돕고 인지 기능을 깨우는 데 도움을 주어, 베티버와 함께 사용하면 '차분한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좋다.


저녁의 안절부절못함, '깊은 휴식'으로 전환하기

목표: 하루의 잔상을 털어내고 온전한 쉼 누리기

하루 종일 긴장 상태로 지내다 보면, 저녁이 되어도 뇌가 쉬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 경우가 많다. 낮 동안의 실수나 내일의 걱정으로 머릿속이 시끄러울 때, 베티버의 힘으로 신경계를 진정시키고 깊은 휴식 모드로 전환하는 것이 목표이다.


추천 향기 조합: 베티버 & 라벤더

베티버(Vetiver)의 깊은 진정 효과와 라벤더(Lavender)의 이완 효과가 만나, 들뜬 신경계를 가장 편안한 상태로 이끌어준다. 잠 못 이루는 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끊어내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시간 관리가 어렵다는 것은 당신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닐 수 있다. 단지 당신의 뇌가 시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보다, 눈앞의 생생한 감각과 감정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일 수 있다. 시간을 통제하고 지배하려 애쓰며 괴로워하는 대신, 향기라는 도구를 통해 시간의 흐름을 부드럽게 감각하고 그 흐름에 올라타는 법을 배워보는 건 어떨까?

베티버의 깊은 흙냄새는 흩어지기 쉬운 당신의 시간을 단단하게 붙잡아 줄 것이다. 아침의 샤워에서, 오후의 책상 위에서, 그리고 잠들기 전 침가에서 베티버와 함께하는 짧은 순간들이 모여, 당신의 하루를 더욱 밀도 있고 평온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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