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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을 다시 읽는 세 가지 시선

위로만으로는 닫히지 않는 문이 있다

by 이지현

12월의 공기에는 특유의 냄새가 있습니다. 차가운 바람 냄새 사이로 묘한 들뜸과 아쉬움이 섞여 있는 듯합니다. 거리에는 구세군 종소리가 들리고, 지인들과 나누는 대화의 끝은 약속이나 한 듯 "올해도 고생 많았어"라는 말로 맺어지곤 합니다.


치열하게, 혹은 버겁게 일 년을 건너온 서로의 어깨를 토닥이는 그 온기는 분명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지만 혼자 남겨진 방 안, 다이어리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 찾아오는 감정은 조금 다릅니다. 타인의 위로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 빈 공간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것은 해상도가 낮은 기억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나 올해 뭐 했지?"라고 스스로 물었을 때, 선명한 장면보다는 뿌연 안개처럼 막연한 감정들만이 떠오를 때 우리는 허무함을 느낍니다. 그냥 바빴어, 별거 없었어, 힘들었어 같은 뭉툭한 단어들로 2025년을 덮어버리기엔, 당신이 흘려보낸 시간의 결은 훨씬 더 복잡하고 소중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막연한 위로를 넘어선, 선명한 복기의 과정입니다. 바둑 기사가 승패가 결정된 후에도 돌을 하나하나 다시 놓아보며 수의 의미를 되짚듯, 우리의 지난 1년도 다시 놓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감상적인 회고는 잠시 내려두고 확인해보자


1. 감정 (Emotion)

내 마음의 기상도 그리기

기억은 자주 왜곡됩니다. 좋았던 기억은 금세 휘발되고, 아팠던 기억은 실제보다 더 깊은 생채기를 남기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억에 의존하는 대신, 그 당시 내가 느꼈던 감정의 이름을 정확히 호명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올해 당신의 내면을 가장 자주 채웠던 기분은 무엇이었나요? 단순히 좋았다, 나빴다의 이분법이 아닙니다.

누군가는 성취감보다는 안도감으로 한 해를 버텼을지 모릅니다. 또 누군가는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끊임없이 불안이라는 파도 위에 서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무미건조한 권태가 일상을 지배했거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 소소한 설렘이 삶을 지탱해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감정에 구체적인 이름을 붙여주는 작업은 생각보다 큰 힘을 발휘합니다. 내가 느꼈던 것이 단순한 짜증이 아니라 인정받지 못한 서러움이었음을 알게 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 감정을 떠나보낼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회피하지 않고 직면한 감정은 더 이상 나를 괴롭히는 유령이 아니라, 나를 이해하는 데이터가 됩니다.



2. 몸 (Body)

가장 정직한 1년의 기록

마음은 "이 정도면 괜찮아", "조금만 더 버티면 돼"라고 스스로를 속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은 거짓말을 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몸은 지난 1년의 스트레스, 긴장, 휴식의 부재를 고스란히 기록하고 있는 육체적 로그와 같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올해 당신의 몸을 떠올려 봅니다. 자고 일어난 아침은 개운했나요, 아니면 늘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나요? 유독 어깨가 자주 뭉치거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두통에 시달리지는 않았는지, 혹은 급격한 체중의 변화가 있었는지 살펴봅니다.


몸이 보내는 신호는 꽤 정확합니다. 만약 올해 유독 에너지가 고갈된 느낌을 받았다면, 그것은 당신의 의지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삶을 운용하는 방식 어딘가에 과부하가 걸렸다는 명백한 신호입니다.


우리는 종종 몸을 마음을 담는 그릇 정도로만 생각하지만, 사실 몸이 마음을 지배할 때가 더 많습니다. 2025년의 내 몸 상태를 점검하는 것은, 2026년을 달릴 수 있는 엔진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과 같습니다.


3. 환경 (Environment)

나를 둘러싼 세계

우리는 흔히 나의 의지로 삶을 살아간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행동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의지보다 강력한 것은 환경입니다. 내가 머무는 공간, 내가 만나는 사람, 내가 소비하는 콘텐츠가 결국 나라는 사람을 빚어냅니다.


지난 1년, 당신이 가장 오래 머물렀던 공간을 떠올려 봅니다. 책상 위는 정돈되어 있었나요, 아니면 혼란스러웠나요? 침실은 오롯이 휴식을 위한 공간이었나요, 아니면 잠들기 직전까지 스마트폰 불빛이 번쩍이는 공간이었나요?


물리적 환경뿐만 아니라 관계적 환경도 중요합니다. 만날 때마다 영감을 주고 에너지를 채워주는 충전기 같은 사람이 있었던 반면, 만날수록 기분이 소모되고 자존감이 깎이는 방전기 같은 관계도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어떤 환경에 나를 노출시켰는지를 돌아보는 일은, 내가 나를 얼마나 아껴주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연결된 고리를 발견할 때, 변화는 시작됩니다

이 글을 읽으며 감정, 몸, 환경을 각각 떠올려 보셨다면, 이제 이 세 가지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 들여다볼 차례입니다.


아마도 이런 패턴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패턴 A: 업무 스트레스로 방을 치우지 못하니(환경)
→ 집에 들어갈 때마다 답답함을 느꼈고(감정)
→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야식을 먹어 속이 더부룩했다(몸).

패턴 B: 체력이 떨어져 만사가 귀찮아지니(몸)
→ 사람 만나는 것을 피하게 되고(환경)
→ 고립감과 우울감이 깊어졌다(감정).


이 연결 고리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이번 회고의 핵심입니다. 나의 2025년을 힘들게 했던 것이 단순히 운이 없어서가 아니라, 특정한 악순환의 고리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가오는 2026년을 위해 거창한 목표를 세우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오늘 발견한 이 연결 고리 중 가장 약한 부분 하나를 끊어내는 것으로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어지러운 환경을 정리해 마음의 여유를 찾거나, 수면 시간을 확보해 몸의 컨디션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풍경은 놀라울 만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고생했다"는 말로 덮어두기엔, 당신의 지난 1년은 치열했고 또 소중했습니다. 막연한 느낌 대신 선명한 데이터로 나를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2025년이라는 문을 제대로 닫고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브런치를 주제로 유튜브 라이브를 했어요

아래에서 다시보기 가능합니다.

https://youtube.com/live/79dB_UQ0yGM

스크린샷 2025-12-03 오전 12.07.45.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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