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잎에 담긴 흙의 기억
비가 온 뒤 숲속의 젖은 흙냄새를 연상시키는 패출리는, 그 독특하고 깊은 향기로 인해 오랜 시간 동안 인류의 후각을 자극해 왔다. 동남아시아의 열대 우림에서 자생하는 이 식물은 꿀풀과에 속하지만, 꽃향기보다는 나무나 흙, 뿌리에서 날 법한 묵직한 향을 지니고 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이 향기가 벌레를 쫓고 피부를 보호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는 힘이 있다고 여겨왔다. 패출리의 역사는 화려한 왕실의 기록보다는, 일상생활 속에서 직물을 보호하고 약으로 쓰였던 실용적인 역사와 맞닿아 있다. 인도 남부의 타밀어에서 시작된 이름의 유래를 추적하고, 고대 무역로를 따라 이동하며 동방의 신비로운 향기로 자리 잡게 된 과정을 살펴본다. 이 글에서는 19세기 유럽을 강타하기 이전, 패출리가 고대와 중세 사회에서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했는지 그 기원을 탐구한다.
패출리(Patchouli)라는 단어의 가장 유력한 기원은 인도 남부와 스리랑카에서 사용되는 드라비다어족의 타밀어이다. 타밀어로 녹색을 뜻하는 파차이와 잎을 뜻하는 일라이가 결합하여 패출리가 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패출리 오일이 꽃이나 뿌리가 아닌, 잎을 건조하고 발효시켜 추출된다는 점과 일치한다. 현지 사람들은 이 식물의 잎이 가진 짙은 녹색과 그 안에 숨겨진 강렬한 향기를 식별하여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이 단어는 이후 힌디어 파촐리를 거쳐, 식물이 유럽으로 전해질 때 영어와 프랑스어의 Patchouli로 정착되었다.
식물학적으로 패출리는 Pogostemon cablin이라는 학명을 가지고 있다. 포고스테몬은 그리스어로 수염과 수술의 합성어로, 꽃의 수술 부분에 털이 나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동남아시아(필리핀, 말레이시아 등)가 원산지로 추정되는 이 식물은 덥고 습한 기후에서 잘 자라며, 넓은 잎에 향기 주머니를 가득 담고 있다. 신선한 잎에서는 특유의 흙냄새가 강하게 나지 않지만, 잎을 수확하여 그늘에서 말리고 발효시키는 과정을 거치면서 세포벽이 파괴되고, 이때 비로소 우리가 아는 그 깊고 진한 향기가 생성된다고 한다.
고대 로마나 그리스의 문헌에서 패출리를 특정하여 지칭하는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다. 이는 패출리가 주로 인도와 동남아시아에 국한되어 사용되었거나, 혹은 나드나 발레리안 같은 다른 흙냄새 나는 식물들과 혼동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고대 무역 목록에 등장하는 말라바르의 잎이나 정체불명의 향료들 속에 패출리가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명확한 문헌 기록은 부족하지만, 식물의 자생지와 지역 전통을 고려할 때 인도와 동남아시아 지역 내에서의 사용 역사는 매우 깊을 것으로 보인다.
천연 살충제와 직물 보호
인도와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패출리 잎이 가진 강력한 방충 효과를 활용했다. 말린 패출리 잎을 의류나 직물 사이에 끼워 넣어 좀벌레나 해충이 꼬이는 것을 막는 방식은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인도 남부는 면직물과 실크 산업이 발달한 곳이었기에, 귀한 직물을 보호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패출리 특유의 향이 밴 직물은 해충으로부터 안전했을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국적인 향기를 풍기게 되었다. 이는 훗날 패출리 향이 나지 않는 숄은 진짜 인도산이 아니다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으며, 패출리가 직물 무역과 함께 세계로 퍼져나가는 발판이 되었다.
인도의 전통 의학 아유르베다나 동남아시아의 민간요법에서 패출리는 다양한 용도로 쓰인 것으로 전해진다. 주로 뱀에 물린 상처나 독충에 쏘인 곳에 잎을 짓이겨 바르는 해독제로 사용되거나, 열을 내리고 두통을 완화하는 데에도 활용되었다고 한다. 또한, 피부 질환이나 염증을 가라앉히는 데도 효과가 있다고 믿어졌다. 땅의 기운을 가진 이 식물은 신체적, 정신적 균형을 맞추는 도구로 인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고대 아유르베다 문헌에서 패출리를 특정하는 명칭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의 이견이 존재한다.
피부 관리와 치유
동남아시아의 원주민들은 덥고 습한 환경 탓에 발생하기 쉬운 피부 질환을 치료하는 데 패출리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잎을 끓인 물로 목욕을 하여 땀띠나 습진을 예방하고, 피부를 청결하게 유지하는 방식은 민간에서 널리 행해졌다. 또한, 패출리 오일이나 잎은 건조하고 갈라진 피부를 재생시키고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는 효능이 있어 일상적인 상비약처럼 쓰였을 것이다. 거친 숲에서 생활하는 이들에게 패출리는 피부를 보호하고 치유하는 가장 손쉽고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전통적으로 패출리 잎은 감기나 열병에 걸렸을 때 사용하는 약재로 여겨졌다. 잎을 달여 마시거나 몸에 바르면 땀을 내게 하여 체온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이 식물을 카블린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필리핀 지역에서 채록한 현지어 명칭에서 유래했다. 현지인들은 복통이나 설사, 구토 증상이 있을 때도 패출리 잎을 활용하여 위장을 편안하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패출리는 후추나 정향만큼 대량으로 거래된 주류 향신료는 아니었지만, 동방의 희귀한 물품 중 하나로 알음알음 거래되었다. 아랍 상인들은 인도양을 건너오며 다양한 향료와 직물을 수입했는데, 이때 직물의 보존제로 쓰였던 패출리 잎이나 오일도 함께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건조된 패출리 잎은 장기간의 항해 중에도 향을 잃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기에 무역품으로 적합했다.
중세 이슬람 문명은 고도의 향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장미, 자스민, 샌달우드 등 다양한 향료를 증류하고 배합하여 사용했다. 패출리는 그 특유의 고정력 때문에 다른 향료의 향을 오래 지속시키는 베이스 노트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비록 당시 문헌에 패출리라는 명확한 이름으로 기록되지는 않았더라도, 동방에서 온 흙냄새 나는 향료는 아랍 조향사들의 팔레트에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랍 세계는 카펫과 직물 문화가 발달한 곳이다. 인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중동에서도 귀한 양탄자나 의류를 보관할 때 좀벌레를 막기 위해 패출리 잎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패출리 향은 고급 직물 고유의 냄새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비단이나 카펫에서 나는 이국적인 흙냄새는, 그 물건이 먼 동방에서 온 진품임을 증명하는 보증수표와도 같았다.
중세 말기, 베네치아 상인들을 통해 동방의 물품들이 유럽으로 들어왔다. 이때 수입된 비단, 숄, 카펫 등에서는 유럽인들이 맡아본 적 없는 독특하고 강렬한 향기가 났다. 이것이 바로 패출리였다. 처음에는 이 향기의 정체를 알지 못했으나, 사람들은 이 냄새를 동방의 신비로움과 부유함의 상징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패출리 향은 럭셔리한 수입품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중세 유럽인들은 악취가 병을 옮긴다고 믿었기 때문에, 향기가 나는 물건을 몸에 지니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패출리의 강하고 지속력 있는 향기는 나쁜 공기를 막아주는 효과적인 수단으로 여겨졌을 가능성이 있다. 비록 주류 약재는 아니었지만, 동방에서 온 신비한 약초나 향료는 늘 관심의 대상이었다. 일부 약제상들은 패출리를 만병통치약의 재료 중 하나로 소개하거나, 해독제로 판매하기도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세부터 이어진 패출리와 직물의 연결고리는, 훗날 19세기 유럽에서 캐시미어 숄 열풍과 함께 패출리 향수가 대유행하게 되는 역사적 배경이 된다. 중세에는 그저 직물에 배어 있는 냄새였던 것이, 근대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직접 몸에 바르고 즐기는 향수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고대와 중세의 역사는 패출리가 단순한 식물에서 문화적 코드로 자리 잡기까지의 긴 잠복기였다고 볼 수 있다.
녹색 잎사귀 속에 짙은 흙의 기억을 품은 패출리는, 동남아시아의 숲에서 시작하여 인도의 베틀 위를 거쳐 아랍의 시장과 유럽의 항구로 이동했다. 그 이름은 녹색 잎이라는 소박한 뜻에서 출발했지만, 그 향기는 해충으로부터 귀한 직물을 지키는 파수꾼이자, 동방의 신비를 전하는 전령이었다. 화려한 꽃향기는 아니지만, 땅에 뿌리내린 듯한 묵직함과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는 특유의 성질 덕분에, 패출리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자신의 영역을 구축해 왔다. 고대인들이 직물 사이에 끼워 넣었던 그 마른 잎사귀 하나가, 오늘날 전 세계 향수 산업을 지탱하는 중요한 기둥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