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의 수염에서 채취한 태양의 눈물
지중해의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크레타 섬이나 키프로스 섬의 암석 지대에는 '시스투스'라 불리는 관목이 자생한다. 랍다넘은 바로 이 시스투스 나무가 강렬한 자외선과 건조함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잎과 줄기에서 분비하는 끈적한 수지를 말한다. 현대 향수 산업에서 랍다넘은 고래를 희생시키지 않고도 앰버(용연향)의 향을 재현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식물성 대체재로 꼽힌다. 특유의 달콤하고 묵직한 가죽 향, 그리고 사향을 연상시키는 동물적인 뉘앙스는 향수의 베이스 노트로서 향기를 오랫동안 지속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대중적으로 랍다넘은 이름조차 생소하거나, 아편 성분이 든 약물인 '로다넘(Laudanum)'과 혼동되기도 한다. 그러나 랍다넘은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가 착용했던 가짜 수염을 고정하던 접착제였으며, 성서에 등장하는 귀한 향료이자, 중세 유럽의 흑사병을 막기 위한 방역의 도구였다. 무엇보다 이 고귀한 향료를 얻기 위해 고대인들이 염소 떼를 이용했다는 사실은 인류의 기발한 채취 역사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이번 글에서는 랍다넘의 어원적 기원부터 고대 문명의 제단과 현대의 니치 향수 산업에 이르기까지, 이 끈적하고 검은 수지가 걸어온 신비로운 여정을 알아본다.
'랍다넘'이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 '라다논(Ladanon)'에서 유래했다. 언어학자들은 이 단어가 셈어 계통의 어근인 '라단(Ladan)'에서 파생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이는 '끈적한 허브' 혹은 '수지'를 의미한다. 고대인들에게 랍다넘은 특정 식물의 이름이라기보다는 그 식물에서 얻어지는 끈적한 물질 그 자체를 지칭하는 명사였다. 초기 인식 속에서 랍다넘은 식물에서절로 배어 나오는 땀이나 눈물처럼 여겨졌으며, 신이 내린 선물로 간주되었다.
랍다넘을 생산하는 식물의 학명은 Cistus ladanifer 혹은 Cistus creticus이다. 속명인 '시스투스(Cistus)'는 덤불이나 상자를 뜻하는 그리스어 '키스토스(Kistos)'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씨방의 형태가 상자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영어권에서는 이 꽃이 장미를 닮았고 바위틈에서 잘 자란다 하여 '록로즈(Rockrose)'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장미과와는 식물학적으로 무관하며, 록로즈라는 이름은 시각적 유사성에서 비롯된 관용적 명칭이다.
크레타 섬의 주민들은 랍다넘을 채취하는 도구를 '라다니스테리온'이라 불렀으며, 수지를 '라다노'라고 칭했다. 스페인에서는 랍다넘을 생산하는 시스투스 숲을 '하라(Jara)'라고 부르며, 이곳에서 생산된 오일은 스페인 향수 산업의 중요한 자원이 된다. 각 지역의 명칭은 랍다넘이 단순한 야생 식물을 넘어, 해당 지역의 경제와 문화를 지탱하는 중요한 자원이었음을 보여준다.
고대 이집트 문명에서 랍다넘은 권력의 상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파라오들은 신과 같은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염소 털로 만든 가짜 수염을 턱에 붙였는데, 이때 사용한 접착제가 바로 랍다넘이었다. 랍다넘의 끈적한 점성과 독특한 향기는 왕의 위엄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시신을 미라로 만들 때 방부제로 사용하거나, 신전에 피우는 복합 향료인 '키피(Kyphi)'의 핵심 재료로 쓰이며 이집트의 영적 세계를 지배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랍다넘의 독특한 채취 방법을 기록으로 남겼다. 아라비아의 목동들은 염소 떼를 시스투스 덤불 숲으로 몰아넣었다. 염소들이 덤불 사이를 누비며 잎을 뜯어먹는 동안, 끈적한 수지가 염소의 긴 수염과 털에 달라붙었다. 목동들은 숲에서 돌아온 염소의 털을 빗질하여 랍다넘을 채취했다. 이 방식은 식물에 상처를 입히지 않으면서도 가장 질 좋은 수지를 얻는 고대인들의 지혜였다.
구약성경 창세기에 등장하는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에게 팔아넘길 때 등장하는 향료나, 야곱이 이집트 총리에게 보낸 선물 목록에 있는 '몰약(Myrrh)' 혹은 '유향' 중 일부가 실제로는 랍다넘(Ladanum)이었을 것이라는 학설이 유력하다. 히브리어 성경의 '로트(Lot)'라는 단어가 랍다넘을 지칭한다는 해석이다.
미노아 문명과 크레타의 향기
크레타 섬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미노아 문명에서 랍다넘은 주요 수출품이었다.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크레타인들은 랍다넘을 올리브 오일에 섞어 향유를 만들었으며, 이를 이집트와 주변 국가로 수출했다. 크레타의 여인들은 랍다넘을 피부 미용과 향장용으로 사용했으며, 사제들은 의식을 치를 때 랍다넘을 태워 신성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크레타 섬은 고대 지중해 랍다넘 무역의 허브였다.
그리스 신화의 전설에 따르면, 올림포스 신들 사이에서 랍다넘의 용도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신들은 랍다넘을 전사들의 상처를 치료하는 약초로 쓰길 원했고, 여신들은 피부를 아름답게 가꾸는 미용 재료로 쓰길 원했다. 결국 랍다넘은 두 가지 효능을 모두 가지게 되었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랍다넘의 향기를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그녀의 신전에는 시스투스 꽃이 바쳐졌으며, 랍다넘 향유는 여신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화장품이었다. 고대 그리스 여인들은 랍다넘을 꿀에 섞어 얼굴에 바르거나 머릿기름으로 사용하며 여신과 같은 아름다움을 꿈꾸었다. 랍다넘은 관능적이고 매혹적인 여성성을 상징하는 향기였다.
지중해의 시골 마을에서는 랍다넘을 악령을 쫓는 부적으로 사용했다. 집 입구에 시스투스 가지를 걸어두거나, 아이들의 목에 랍다넘 수지가 든 주머니를 걸어주었다. 랍다넘의 강한 생명력과 불을 견디는 성질이 나쁜 기운을 태워버리고 가족을 보호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는 랍다넘이 단순한 향료를 넘어 민간 신앙의 영역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음을 보여준다.
중세 십자군 전쟁은 동방의 향료가 유럽으로 대거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십자군 기사들은 성지에서 돌아오며 랍다넘을 비롯한 다양한 향료를 전리품으로 가져왔다. 당시 유럽은 위생 상태가 좋지 않아 악취가 심했는데, 랍다넘의 강한 향기는 이를 가려주는 데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유럽의 귀족들은 랍다넘을 구하기 위해 베네치아 상인들에게 막대한 값을 지불했으며, 이는 랍다넘이 유럽 상류층의 사치품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염소 털에서 수지를 채취하는 방식은 비위생적이고 생산량이 적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크레타 농부들은 '랍다니스테리온(Ladanisterion)'이라는 도구를 고안해 냈다. 이는 가죽 끈이 여러 가닥 달린 갈퀴 모양의 도구로, 시스투스 덤불 위를 훑고 지나가면 가죽 끈에 수지가 달라붙게 만든 것이다. 이 도구의 발명으로 랍다넘의 대량 채취가 가능해졌으며, 염소 털이나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순도 높은 랍다넘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며 랍다넘은 약재로서의 가치도 인정받았다. 랍다넘으로 만든 고약은 상처를 치료하고 피부병을 낫게 하며, 탈모를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졌다. 17세기 런던 약전에는 랍다넘이 주요 약재로 등재되어 있다. 사람들은 랍다넘을 환약으로 만들어 먹거나 연고로 발랐으며, 그 수요가 늘어나자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지에서도 랍다넘 생산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랍다넘의 역사는 염소의 수염에 묻은 끈적한 땀방울에서 시작되어, 황금빛 액체가 담긴 크리스털 향수병으로 완성되는 연금술의 여정이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부터 현대의 힙스터들까지, 랍다넘은 시대를 초월해 인간의 후각을 매혹하고 영혼을 위로해 왔다. 식물이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방어막인 수지가 인간에게는 가장 호사스러운 향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자연의 아이러니이자 축복이다.
우리가 향수를 뿌릴 때 맡게 되는 그 따뜻하고 묵직한 잔향 속에는, 지중해의 태양과 바위, 그리고 수천 년을 이어온 채취꾼들의 땀방울이 녹아 있다. 랍다넘은 동물성 향료를 대체하며 윤리적인 아름다움을 가능하게 했고, 앰버의 신비를 식물의 언어로 번역해 냈다. 랍다넘은 단순한 향료가 아니라, 대지의 눈물이자 태양의 기억을 품은 살아있는 화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