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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Jul 21. 2020

나는 나를  단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다...!

‘스스로에 대한 인정의 부재에서 오는 불행’에 대하여


“누군가를 인정하기 위해서

자신을 깎아내릴 필요는 없어.

사는 건 시소의 문제가 아니라

그네의 문제 같은 거니까.

각자 발을 굴러서

그냥 최대로 공중을 느끼다가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내려오는 거야.

서로가 서로의 옆에서

그저 각자의 그네를 밀어내는 거야”


김금희_경애의 마음


내가 마지막으로 ‘나쁜 생각’을 했던 건 10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그 상황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는데도 시기가 명확하지 않은 이유는 너무나도 예고 없이 찾아왔던 일이었기 때문이었을까.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는 괜찮다고,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내가 늦은 밤 갑자기 생을 끝낼 방법을 찾고 있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 나는 끝내고자 했었다. ‘도대체 왜...?’ 나 자신에게 이유를 묻고 있었지만 알 길이 없었다. 간신히 정신줄을 붙잡은 그 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도록 잠을 청하는 것뿐이었다.


그 무렵 나는 하고 있던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었고, 기약 없는 일의 공백이 언제나처럼 다시 찾아왔다.

프리랜서의 삶에서 자유롭다는 건 아주 좋은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이대로 영원히 자유로워질 수도 있다는 숙명 같은 현실이 매번 따라다닌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 모든 원인이 불안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불안을 롤러코스터를 타는 스릴쯤으로 가볍게 넘겨버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대로 내 커리어가 끝나고, 나의 존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될까 봐 늘 마음 졸여야 했던 나였기에 결코 단순한 문제는 아니었다. 처음으로 내가 마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병명을
‘일의 부재에서 오는 불안’으로 정의 내렸다.
그것은 일을 시작하고 7년이 지나
‘내가 나 자신에게 한 첫 인정’이었다.


시간이 해결해주리라 생각했지만 쉽사리 마음의 갈피는 잡히지 않았고, 그날 밤 이후 일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의욕까지도 필요 없이 시시때때로 찾아오던 배고픔조차도 거의 느끼지 못했다. 말하자면 나는 살아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과도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지만 다른 사람에게 나를 고백한다는 건 치부를 밝히는 것 같아 엄두를 낼 용기가 없었다. 그 상태로 일을 한다는 게 무리였기에 하는 수없이 세상과의 일시적 단절을 선택했다. 가족, 절친들에게 생존 여부 정도만 알리고 나머지 모든 연락을 끊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내 사람들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그리고 나는 나를 집에 가뒀다. 자발적 외톨이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렇게 나를 가만히 두자니 또다시 나쁜 생각을 하게 될까 봐 겁이 났다. 무작정 닥치는 대로 소설을 읽기 시작했다. 사실 그 행위는 독서라기보다는 글자를 읽는 단순한 동작을 반복하는 것에 더 가까웠다. 혼자만의 힘으로 생각의 틈을 없앨 무언가가 필요했으니까. 하루에 많게는 세 권씩 책을 해치우면서(?) 내가 내린 처방은 서서히 효과를 보이기 시작했고, 글자만 읽던 내가 조금씩 소설 속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2주의 시간이 흘렀을 때쯤 깨달았다. 내가 왜 마음의 병을 얻게 됐는지.


그토록 원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나는 사는 게 너무 힘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다 잘 살고 있는데, 오직 나만 뒤쳐진 것 같았다.

물론 순간순간 행복한 적도 있었지만 그 보다 더 긴 시간 우울해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나를 돌아보지 않았다. 혹시라도 돌아보면 지금보다 더 많이 뒤처지게 될까 봐 앞만 보기에도 시간은 늘 부족했다. 그렇게 나를 다그치기만 했는데, 결과는 영 만족스럽지 않았다. 아니, 만족할 수가 없었다. 나에겐 남들이 인정하는 내가 가장 중요했고, 오직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기준 안에서 행복을 보상받고자 했으므로 나는 나를 단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다. 나에 대해서는 그렇게 인색하면서도 타인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후했기 때문에 사람들과의 격차는 더 커져만 같다.

그렇게 점점 ‘나만’ 무능력한 사람이 되어갔다.
그때 내가 읽은 소설 대부분은 실제의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들이었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나는 무수히 많은 나를 만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상상의 이야기에 몰입하면서 비로소 현실의 나를 돌아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때 알았다. 사는 건 나만 힘든 게 아니라 모두가 다 힘들다는 것. 다만 서로에게 보여주지 않거나, 들키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것뿐. 그런데 왜 나는 ‘나만’이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남들의 평가가 중요했으면서도 정작 인정을 받았을 때는 당연한 것으로 치부했고, 아주 사소한 부정적 평가에는 크게 상처 받거나 좌절했다. 그렇게 나는 나를 점점 더 무능한 사람으로 스스로 만들어갔다. 내가 행복하지 않았던 건 내가 무능력하기만 한 것이 아닌데도 나만 내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매번 의심하고 자학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병명을
 ‘스스로에 대한 인정의 부재에서 오는 불행’으로
다시 정의 내렸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고 하지만 내 생각에는 성적순이 맞다.


다만 행복은 누구보다 높은 점수를 받아야만 하는 상대평가 아니라 내가 어떤 점수를 주느냐에 달려있는 절대 평가에 가깝다. 그래서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보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게 중요하다. 보이는 게 전부였다면 아무도 이렇게 묻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행복해요?’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사는 건 세상에서 내가 가장 힘든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그때처럼 나쁜 생각을 한 적은 없다.


크든 작든 오늘은 오늘만큼의
행복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도가 낮을지언정 그렇다고 안 행복한 것은 아니니까. 비록 그게 정신승리일 뿐일지라도 나는 괜찮다. 오늘도 아메리카노 향기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어서 내가 지금 행복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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