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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진 Jul 23. 2020

한라산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태산이 높다 하되 '다 왔다'는 마법의 주문이 너를 정상에 가게 할지어다


아닌 것 같으면서도

멈출 수 없을 때가 있다.


마음을 그치게 할 방법은

오직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다.    


한창 뛸 때라는 초등학교 시절에도 100m 달리기를 20초 안에 끊어본 적이 없던 내가, 평소 운동이라는 것은 1도 안 하는 내가, 등산은 케이블카 타고 하던 게 전부였던 내가, 누군가처럼 다시 내려올 곳을 왜 올라가느냐고 하던 내가, 한라산을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시작은 다소 엉뚱했다.

평소 동경하던 사람이 제주도에 다녀온 사진을 SNS에 올렸길래, 팬심 충만해서는 '조만간 저도 제주도에 갈 생각이에요'라고 댓글을 달았다. 물론!!!! 갈 생각이었다. 한라산만 빼고!


그런데 그가  
‘한라산은 꼭 가봐!’
라고 하는 게 아닌가....


댓글 받은 것에 만족하면 됐을 텐데, 내 마음은 그러질 못했다.
그가 보았던 것을, 그가 느꼈던 그 감동을 나도 가져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초특급 저질 체력인 나에게 등산, 그것도 한라산은 무리였다. 하지만 이런 나의 생각과는 달리 손가락은 이미 한라산 등산 코스를 검색하고 있었다. 마음이 시키는 일 어쩌겠는가 가보는 수밖에... 열심히 체력은 안 만들고, 등산을 글로 배운 결과 보통 사람들이 7~8시간 정도에 완주한다고 하니, 나는 9시간이면 끝낼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계산이 섰다.


출발은 내 생각처럼 아주 호기로웠다. 그러나 등산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나는 그 산이 어떤 산인지도 모르고, 아주 신나게 1시간을 걷고 방전돼버렸다. 뒤늦게 너무나 큰 목표를 잡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포기가 되지 않았다.


얼마나 올라가면 돼요?


내 물음에 등산객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이 대답해주었다.


여기서 조금만 올라가면 돼요
거의 다 왔어요


한라산을 1도 몰랐던 나는 그 말을 전적으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예상하듯이 거의 다 왔다는 그곳(?)은 30분이 지나도, 1시간이 지나도 내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고, 몇 번을 다시 물어도 그들의 대답은 ‘다 왔다’였다.  


체력의 한계가 온 지 이미 오래, ‘졌잘싸’ 할지 말지 결정을 해야 했지만 ‘만약에’가 계속 내 발목을 잡았다.


 만약에 진짜 다 온 거면 어쩌지...?


그때 내가 경험한 만약에의 힘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학교 다닐 때 그렇게 수학을 못하더니 앞으로 남은 건 계산도 안 하고, 그저 지금까지 올라온 게 아까워서 ‘다 왔다’는 마법의 주문에 걸린 채로 모든 것을 단념하고 그냥 묵묵히 오르고 또 오르기만 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라는 말을 되새기면서...


그렇게 등산 4시간 반 만에 오른 한라산 정상!

내 눈으로 직접 겪은 한라산은 그의 말처럼 여러 면에서 대단했고, 엄청났다. 태극기를 준비해 갔다면 나는 자랑스럽게 들고 사진도 찍었을 거다. 마치 내가 엄홍길 대장님이라도 된 듯 말이다. 그만큼 감동적이었다. 무엇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그가 왜 이곳을 꼭 가보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 그거 알았으면 됐어!
어차피 그게 알고 싶어서 오른 등산길...


이날 나의 한라산 등산 기록은 9시간 30분.

첫 등산 기록이자, 현재까지 마지막 등산 기록이다. 많이 초라한 기록이지만 나는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진짜 내 피, 땀, 눈물로 이뤄낸 아주 정직한 기록이니까. 아울러 ‘다 왔다’는 말로 나를 거하게 낚아준 그분들에게 이 영광스러운 기록을 바치고 싶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진즉에 때려치우고 진달래 대피소에서 컵라면 한 그릇 먹고 내려왔을 것이다. 아마도 ‘역시 이곳이 라면 맛집이다’라고 하면서 엄청 만족했겠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한라산이 그런(?) 산인지 몰라서 끝까지 해낼 수 있었다. 등산에 있어서만큼은 ‘아는 건 힘’이 절대 아니고, ‘모르는 게 약이다’ 특히 나와 같은 초보 등사너(등산+er)들에게는. 실은 모든 도전이 그렇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아는 건 많아지고 그럴수록 시작하는 게 두렵다. 과정을 어느 정도 짐작할 뿐 결과까지 아는 게 아닌 데도 이미 결말까지 다 본 영화처럼 생각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습관처럼 머리에 배겨버린 것이다. 그러다가 또 미련이 생기면 '만약에'라는 말로 지난 시간을 아쉬워하겠지.


조금이라도 후회를 덜 하는 방법은 머리가 아닌 마음을 믿는 일 같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우직하게 한 곳을 향하는 마음을 그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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