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생의 모든 자랑들과 작별하는 것만 같았던 그날
나는 기억한다. 하교 후, 학교 앞 공원에 울려퍼지는 가위바위보 소리를. 우리 제제가 그 틈에 서서 팔을 흔들며 “이겼다!” 하며 눈이 없어지게 웃던 그 시간을, 어찌 잊을까. 엄마, 아빠, 동생과 수 백 수 천 번 연습했던 그 ‘눈물의 가위바위보’를 혼자가 아닌, 친구들과 함께라니! 바위가 가위를 이김을 이해하고, 가위를 내고 싶을 때, (보자기가 아닌) 가위 손동작이 나가는 협응을 해내기까지, 제제가 얼마나 많은 연습을 해왔는 지 모른다. 결코 안 될 줄 알았는데, 해낸 것이다. 어떤 고문도 이 만큼 아플까 싶게, 속이 따끔따금 따갑고, 눈물이 자주 고였던 2023년 3월. 그럼에도 그 봄은 살면서 가장 좋았던 열 장면 중에 한 장면으로 꼽히리라.
제제는 상호작용이 어려운 아이다. 책보고, 그림 그리며 혼자 놀이에 푹 빠져서, 엄마를 찾지 않는다. 또래와 놀이를 할 때면, 규칙을 잘 이해하지 못해 슬그머니 혼자가 된다. 어린이집을 다닐 때는, 구성원이 10명이 넘지 않는 곳에서, 보조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입학식 날, 나와 제제는 강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제제는 감각이 보통 사람들보다 과자극으로 수용된다. 많은 사람이 모이거나, 낯선 공간에 가면 많은 소리가 겹쳐 들리고, 보이는 것도 많아져서, 자극에 대한 반응 조절이 어려워, 괴롭다. 강당을 꽉 채운 입학생들과 엄마들 틈에서, 제제는 탈출하고 싶었을 것이다. 예상은 했지만, 나는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다. 제제를 부둥켜 안고, 달래 보았지만 아이는 여전히 힘들어 했다. 덩치가 꽤 큰 제제를 껴안고 있자니, 책가방, 신발주머니, 학교에서 받은 자료들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고, 제제는 계속 땀을 뻘뻘 흘렸다. 입학생들과 학부모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제제와 입학식장을 박차고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입학식이 처음이었던 그때의 나는 차마 용기가 없었다. 제제가 담임 선생님을 따라 교실로 가고, 나는 교감 선생님의 교육 방침을 이어서 들었다. 20명이 넘는 학생들이 있는 낯선 교실에 처음 간 제제는 긴장한 탓에, “마트! 마트!”라는 큰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느닷없는 소리였다. 음성 틱을 처음으로 한 것이었다. ‘제가 지금 어찌할 바를 몰라, 애쓰는 중이니, 이해 부탁드려요.’ 라는 외침이었을 것이다.
입학 후 두 달 여쯤 지나 상담을 하러 남편과 함께 학교에 갔다. 담임 선생님은 입학 이후, 제제가 했던 말과 행동을 매일 꼼꼼히 써오셨고, 차분히 읽어주셨다. 남편과 나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담임 선생님이 물으셨다.
“정신과 전문의이신 아버님 보시기에, 우리 제제, 정확한 진단명은 어떻게 될까요?”
“고기능 자폐 스펙트럼입니다. 말 그대로 스펙트럼이라, 자폐 성향을 가진 이들의 특성이 워낙 다양합니다만, 제제는 인지수준이 높은 편이라, 상호작용을 제외하면, 일상생활의 불편함은 덜합니다”
“네, 예상했던 대로 말씀 주시네요. 제제가 학습이 어느 정도 되다 보니, 아마 학교생활도 잘 할 것이라 생각하셔서, 일반학급에 보내셨을 것 같아요. 하지만, 현재 제제는 교실에서 혼자 수업 받기가 어렵습니다. 지시수행이 전혀 안 되고 있어요.”
고기능 자폐 스펙트럼. 나는 그 단어를 여러 번 소리내 발음해 보았다. 제제를 낳은 지, 만 6년이 되었지만, 남편이 그 단어로 제제를 설명하는 것은 그날 처음 들었다. 왜 그동안 나한테는 말하지 않았을까. 나는 그저 제제를 발달지체로만 이해하고 있었다. 남편은 내가 그렇게만 믿게 두었던 것 같다. 상담을 마치고, 학교 앞 놀이터를 빠져나오는 동안, 마흔 해 동안 내가 쌓아온 인생의 계급장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나의 이생의 모든 자랑들과, 작별하는 시간. “당신 아이를 봐. 당신이 계속 잘난 척 할 수 있나?” 모두가 팔을 들어, 나를 가리켜 비난을 쏟아내도 달게 받아야 할 것 같은, 진한 외로움이 밀려왔다.
다른 아이들에게 가는 피해를 최소화 하기 위해, 나는 오전에만 학교를 보내고 데려오곤 했다. 아이가 오랜 시간 주목 받는 것이 나로서는 힘들었다. 하교 시간에 같은반 친구나 학부모들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컸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그 시간을 보다 담담히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것 같다. 생각했던 대로 인생이 풀리지 않는 것에 대해, 잠시나마 참담한 심정이기만 했던 것도 아이에게 미안했다. 나와 아이를 잘 보살피는 쪽으로 시간을 썼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낯선 세계에 돌연히 들어가, 자기도 모르던 자신과 맞딱뜨려 당혹스러웠던 제제는, 이내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제제다움으로 사랑받으며 1학년을 마쳤다. 나는 언제나 밥을 사고싶기만 하고, 누군가에게 얻어먹고 싶지 않았다. 제제를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자식이 아닌 게 못내 힘겨웠을 나는, 이 시간을 통과하며 달라졌다. 이제는 누군가의 호의를 받는 것 또한 참 좋아하게 됐다. 내 아이가 조금 늦게 자라지만, 잘 자란 다른 아이들의 덕을 보며 살아도 되는 일이다. 나만 호의를 베풀고 싶은 마음은 이기심 이었음을 돌아보게 됐다. 우리가 사랑을 나눌 때, 나라는 존재가 언제나 번듯할 수만은 없다. 누군가는 작은 언덕, 다른 누군가는 더 큰 언덕으로 서로의 곁에 존재할 수 있다. 그것 역시 사랑임을 배웠다.
제제가 아니라면 이 기쁨들을 어찌 다 알았을까. 제제에게 먼저 말 걸어주는 친구들의 반짝이는 얼굴과 그 아이들의 이름의 예쁨을 말이다. 제제가 잘 챙기지 못한 가방을, 날마다 옆에서 들어주는 친구의 손을, 나는 이 고마운 손길과 눈길을 알 턱이 없었을 것이다. 다 가지지 않아서 알게 되는 기쁨. 겨울 빈 땅에서 솟아났기에 그 생명력이 더 신비한 봄 새싹처럼.
기억하기에, 그 봄은 특별했다. 그해 봄 끝자락에, 나는 감사한 이름을 30명도 넘게 호명하고 있었다. 연말 연기대상 시상식 여배우처럼, 잊은 스탭의 이름은 없을까 돌아보게 하는 이 든든한 봄의 사람들을 나는 오래 추억할 것이다.
제제가 친구를 사귀는 데는 앞으로도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는 분명 자랄 것이다. 음식물을 받아들인 몸이 그 영양분을 빠짐없이 아이가 자라는 데 다 쓰는 만큼, 아이의 사회성도 적당히가 아닌, 날마다 최대치로 자라리라. 그리고 그 곁에 있는 나도, 다소 혼자인 아이들에게 한마디 응원이라도 더 건넬 수 있는 어른이 되어 가기를. 비슷하게 어려운 육아를 하는 엄마들에게도 따스한 이웃 동지로 한뼘 자라갈 것을 각오했던, 봄이었다.
다시 봄이다. 어느 날 날벼락처럼, 사실 아직도 제제가 실감나지 않을 때가 있다. 자폐 스펙트럼은 병아리가 껍질을 깨듯, 어느 날 완전히 없어질 수도 있다는 말을 목숨처럼 믿는다. 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런 죽음, 뜻하지 않은 아픔 등 날벼락은 또 찾아올 것이다. 그때마다 내가 쉬이 날아가지 않도록, 나 자신을 꽉 보듬어 주며 살아가려 한다. 지난 봄, 나와 제제가 잘 버틸 수 있게, 모든 경계에 꽃으로 피어준 이들을 되짚어 보니, 오는 봄이 벌써 감격스럽다.
-------얼마 전, 이상인 배우님의 가족을 너트뷰로 접하다가...2년 전, 그날이 떠올라 써둔 글을 다시 옮깁니다.
공감이 커서, 저도 많이 울었고 그 아내분을 만나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었습니다. 어느 인생이나 적응이 되어 가지만, 그럼에도 어느 3월 막바지 추위의 바람에 엄마는 자주 휘청이게 됩니다. 여러방향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우리를 이리저리 헤집지만, 그 바람과 함께 몸을 뉘어봅니다. 꺾어지지 않으려 안간힘 쓰지 않고, 그저 부는 바람에 함께 휘어졌다 펴졌다 해보기로 합니다. 모든 상처를 더욱 세세히 아파했던 그 날들을 되짚으며, 그래도 이렇게 제제와 나아왔잖아 격려해가며, 옮겨서 다시 씀으로 힘을 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