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현주 Nov 12. 2019

자원봉사를 위한 시장

제현주의 #굿비즈니스_굿머니 #3

여의도의 투자회사에서 일하던 때의 일이다. 1년에 하루, 직원 모두가 자원봉사에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이 생긴 첫해에 프로그램의 코디네이터를 맡게 되었다. 하루짜리 자원봉사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내 빈곤한 상상력이 가닿은 곳은 한국 해비타트였다. 한국 해비타트는 1976년 미국에서 시작한 비영리 국제단체의 한국 지부로, 말 그대로, 주거가 불안정한 취약계층의 사람들에게 집을 지어준다. 그 집에 입주할 사람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이 집을 짓는 일에 힘을 보탠다. 그러니 힘을 쓸 자원봉사자가 늘 필요한 단체다. 한국 해비타트에 처음 전화를 걸어 나누었던 대화가 생생히 기억난다. “특별한 기술을 갖고 계시나요?” “특별한 기술이 어떤 거죠?” “아, 그러니까 미장이나, 목수 일을 할 줄 안다든가…” 이쯤까지 설명하던 해비타트 직원의 말끝이 흐려졌다. 하나 마나 한 질문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금세 깨달은 듯했다. “아니요, 특별한 기술은 없습니다”라고 답을 하는 와중, 머릿속으로 여러 허망한 대답이 떠올랐다. 회사 사람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떠올렸고, 다른 자리에서였더라면 의미가 있었을 우리의 ‘기술’은 그 자원봉사 현장에서 아무 기술도 아닐 게 분명했다.
  

그날 하루의 자원봉사가 각자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았을지 모르겠다. 시멘트를 나르거나 공사 막바지인 가구들의 마무리 청소를 하는 등의 잡일을 거들며 반나절을 보낸 뒤 점심참을 먹고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졌을 때, 모두가 휴게소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낮잠에 빠져들었다. 휴게소가 코 고는 소리로 떠들썩해졌고, 나는 비죽 웃음이 났다. 자신의 일터에서 어떤 ‘기술’로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와는 상관없이 일꾼 1, 일꾼 2가 되어 하루를 보내는 것은 값진 체험이었다. 하지만 경제성의 차원에서 보자면 ‘이 인력의 더 나은 사용처가 있을 텐데’ 싶었다. 재무전문가 ‘김○○’, 프로그래머 ‘이○○’, 마케팅 전문가 ‘박○○’인 채 그대로 할 수 있는 자원봉사는 없을까. 이런 생각은 물론 그때뿐이었다. 하루짜리 자원봉사는 이듬해에도 이어졌고, 나는 “노동강도를 좀 낮춰줘”라는 민원을 반영해 다른 하루를 기획했지만 일꾼 1, 일꾼 2가 되지 않을 방법은 딱히 찾을 수가 없었다.

내게는 잠깐이었던 이 생각을 붙들어 사업으로 만든 사람이 있다. 투자은행에서 일하던 레이첼 청이 체험한 하루짜리 자원봉사 역시 건설 현장이었고, 비슷한 생각이 그녀의 머리에도 떠올랐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레이첼은 ‘캐처파이어’라는 사업체이자 플랫폼을 만들었다. 캐처파이어(www.catchafire.org) 사이트에 들어가면, 당신이 가진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비영리단체의 다양한 프로젝트를 볼 수 있다. 가장 짧게는 1시간짜리 전화통화에서부터, 길게는 2달짜리 프로젝트까지. 당신이 경영 컨설턴트라면 사업계획서 작성 프로젝트에, 개발자라면 홈페이지 구축에, 인사 전문가라면 인사정책 설계에 힘을 보태줄 수 있다. 더 단순하게, 당신이 홍보 전문가라면 이제 막 새로운 홍보 캠페인 설계를 시작한 비영리단체의 직원과 통화하며 이런저런 질문에 대답해줄 수도 있다.

10만명이 넘는 ‘기술’을 가진 자원봉사자가 캐처파이어에 자신의 이력을 올리고, 딱 맞는 자원봉사에 대한 정보를 받고 있다. 원하는 프로젝트에 지원하면, 비영리단체는 지원자의 이력을 검토한 뒤 그의 도움을 받을지 말지 결정한다. 무엇보다, 비영리단체가 올리는 ‘프로젝트’의 설계가 세심하다. 캐처파이어는 상세하게 프로젝트를 설계할 수 있는, 이른바 ‘메뉴판’을 제시해서 비영리단체가 자신에게 필요한 마케팅 프로젝트가, 또는 인사정책 설계 프로젝트가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정의하고 계획할 수 있게 돕는다.

유급의 노동이든, 무급의 자원봉사든, 필요한 일거리를 일자리로 만들고, 그 일자리에 딱 맞는 사람을 배치해 제대로 쓰이게 하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일, 무엇보다 ‘기술’이 필요한 일이다. 한 사람의 전문가가 비영리단체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그의 전문기술을 아낌없이 쓰겠다 한들, 돕는 일도 도움을 받는 일도 간단치 않다. 비영리단체는 그 기술을 어디에 쓰게 해야 할지 알 수 없고, 전문가는 비영리단체의 사정을 제대로 알 리 없다. 그가 가진 그 기술이 바로 이 단체에 딱 필요한 일인지 미리 알 수 없다면, 전문가 김○○보다는 일꾼 1, 일꾼 2가 대개는 더 유용하다. 매개자 없는 자원봉사의 현장이 대개 단순 노동으로만 채워지는 이유다. 바로 이 빈 곳을 정확히 채우고자 만들어진 플랫폼이 바로 캐처파이어다.

이런 일을 하는 캐처파이어는 비영리단체가 아니라 돈을 버는 사업체다. 다만, 퍼블릭 베네핏 코퍼레이션으로 설립되어 주주의 이익만이 아니라 공익(public benefit)을 함께 추구하도록 정관에 새겨져 있다. 캐처파이어 플랫폼의 사용료를 지불하는 이들은 공익재단들이다. 공익재단들은 캐처파이어에 돈을 지불해 자신들이 후원하는 비영리단체가 캐처파이어 플랫폼을 쓸 수 있게 한다. 비영리단체들은 캐처파이어의 플랫폼에 필요한 프로젝트를 올려 딱 맞는 전문 기술을 가진 자원봉사자를 구한다. 공익재단들이 치르는 값은 비영리단체가 같은 프로젝트를 하는 데 들었을 비용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같은 돈으로 10곳의 비영리단체가 프로젝트를 할 수 있게 된다. 자원봉사자들은 자신의 이름과 기술을 온전히 들고 와 비영리단체를 돕는 기쁨을 누린다. 캐처파이어의 ‘보이지 않는 손’이 자원봉사를 위한 시장을 만들어냈고, 이 시장에서 손해를 보는 사람은 없다. 캐처파이어의 굿비즈니스가 만든 결과다. (끝)




2019년 2월 21일 경향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2212034005&code=990100


매거진의 이전글 을지로와 목포의 미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