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 없이도 같이 뛰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아무래도 원데이 클래스의 썩은 물이다 보니, 훈련 후 진행되는 미니 게임 시작 전이나 게임 진행 중에 이런저런 말을 하게 된다. 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라 어색한 사이지만 한 팀으로 뛰어야 하니 사기 진작도 할 겸 게임을 어떻게 뛰면 좋을지 간단히 이야기를 나눈다.
경기 중에 말을 많이 할 수 있으니 양해 부탁드린다고 미리 양해를 구하기도 하고, 뭉쳐 다니면 위험하니 널찍널찍하게 서고 자신감 있게 하시면 된다는 말도 해둔다. 주목받거나 나서는 데에 적극적이진 않은지라 처음 본 낯선 사람들에게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이 좀 민망스럽긴 한데 (혹자는 네가 뭔데?라고 생각할 수 있으므로) 처음 본 사람이 계속 뭐라 뭐라 소리를 지르거나 어떻게 하라고 얘기를 꺼내는 게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는 기분이 상할 수도 있는 일일 것 같아 예의상으로라도 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한다. 그냥 게임 때 조용히 하면 되지 않나요? 싶을 수 있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분은 직접 경기를 뛰어보십시오…
경기하다 보면 종종 역습의 상황이 생긴다. 상대 팀 공격자가 드리블해 오는 공을 뺏거나 아니면 패스를 차단하거나, 아니면 상대방 라인이 너무 우리 진영으로 올라와 있어 그 빈 뒷공간으로 골킥을 받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역습이 전개된다. 그런데 역습할 때마다 내가 같은 팀 사람들에게 외치는 한 마디가 있으니 “같이 가줘야 해~”이다. (경기 중에는 존댓말을 사용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짧은 단어를 외치거나 아니면 평어를 사용한다. 일방적으로)
같이 가줘야 한다는 말은 비록 당신에게 지금 공은 없지만 함께 골대까지 뛰어가 줘야 한다는 뜻이다. 어차피 나에게는 공이 없고, 님이 공을 몰고 가다가 슈팅하는 게 확률상 더 나을 거 같은데 아니면 님이 슈팅을 할 게 너무 뻔한데 나의 체력을 낭비하며 같이 뛰어줘야 한다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같이 뛰어주는 사람이 있는 것과 아닌 것은 경기에 있어 천지 차이다.
우선 한 명이라도 동시에 뛰어준다면 골키퍼와의 1대 1이 아니라, 2대 1을 만들 수 있다. 골키퍼의 입장에서 경기 진행 과정을 봤을 때 현재 공을 드리블해서 오는 사람이 슈팅할 확률이 아무리 높다 해도, 막상 그 상황에 닥치게 되면 수비하는 입장에서는 그러한 확률 계산하에 반응하지 않는다. 두 명이 오고 있지만, 확률상 저 사람이 슛할 확률이 높으니 저 사람만 막아야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실제 슛을 한 번도 하지 않는 사람이더라도 그 상황에서만큼은 동등한 공격옵션으로서 2대 1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골키퍼로서는 지금 볼을 드리블해서 오는 사람과 함께 달려오는 사람 모두를 신경 써야 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훨씬 다양한 옵션을 사용할 수 있고, 심리적 부담도 매우 줄어들게 된다.
실제로, 한 사람이 공을 몰고 가다가 골키퍼가 한쪽으로 쏠린 틈을 타 함께 뛰어와 준 다른 사람에게 패스해서 완전한 오픈 찬스 하에 골을 넣거나 아니면 같이 달려와 준 팀 동료에게 패스를 주는 척하며 골키퍼의 방향을 돌려놓고 슈팅해서 골을 넣을 수도 있다. 아니면 골키퍼가 비록 슛을 막아내더라도 같이 달려온 동료가 문전 쇄도해서 골을 넣을 수도 있다.
축구를 하면서 한 팀이라는 느낌이 가장 많이 들 때가 이 순간이다. 물론 패스가 원활하게 잘 돌아가는 순간에도 느끼긴 하지만, 뭐랄까 이 순간만큼은… 동시에 호흡하고 있음이 강하게 느껴진다. 난데없이 벅차오르는 오타쿠
함께 뛰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특히 함께 뛰어달라고 말하지 않아도 함께 뛰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면 정말 든든하고 짜릿하다. 축구를 할 때뿐만 아니라 일할 때에도.
전체적인 흐름을 읽으며 팀원과 함께 달려주고, 한 명이 수세에 몰리면 합세하여 서포트한다든가,
아니면 콜을 하며 패스를 유도해 공격을 전환하는 것처럼 팀원이 봉착한 어려움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방향 전환/해결책을 제안한다든가,
아니면 슈팅이 실패해도 문전 쇄도를 해서 골을 만들어 내는 것처럼 팀원의 실패를 커버해 주면서도 두 번째 기회를 만들 수 있는 존재.
축구에서는 그냥 옆에서 달리기만 하면 되는데, 일할 때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갖춰야 할 게 너무 많다. 연차가 쌓여 썩은 물이 되면 가능하려나? 그럴 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