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ze 소속 당시 내보냈던 기사를 아카이빙 차원에서 모아둡니다.
2019년 11월 8일
*영화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의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터미네이터: 다크 페이트’는 ‘터미네이터 2: 심판의 날’(1991)에서 미래를 바꿨던 사라(린다 해밀턴)의 절규로 시작된다. 사라는 핵심 기술을 폐기해 인류를 멸망케 할 스카이넷의 존재 자체를 애초에 없던 일로 만들지만, 스카이넷이 미래가 바뀌기 전 시점에서 과거로 보낸 터미네이터가 아들 존(에드워드 펄롱)을 죽이는 것까지는 막지 못한다. 아들을 잃고 포효하는 과거 모습 너머로 들려오는 사라의 목소리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I'm terminated.” 사라가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던 ‘심판의 날’은 리전이라는 새로운 시스템에 의해 도래하고, 파멸한 세상에서 기계가 인간을 사냥하는 처참한 광경은 변하지 않는다. 영화는 전작의 서사를 ‘미래를 바꿨지만, 운명은 바꾸지 못한’ 실패담이라 규정짓고, 실패 이후 새롭게 당면한 과제와 도전을 이야기한다.
인공지능 시스템 리전은 터미네이터 Rev-9(가브리엘 루나)를 과거로 보내 미래 인류의 희망인 대니(나탈리아 레이즈)를 제거하려 하고, 인간 반란군은 이를 막기 위해 그레이스(맥켄지 데이비스)를 파견한다. 대니, 그레이스, Rev-9가 얽힌 상황은 사라, 카일, T-800이 삼각구도를 이루는 1편을 연상시킨다. ‘칼’이라는 이름으로 살며 대니 일행의 보디가드를 자처하는 T-800(아놀드 슈왈제네거)은 우직한 ‘밥 삼촌’으로서 존을 지켰던 2편의 T-800과 닮았다. 그러나 누구와도 관계되지 않은 사라가 뛰어들면서 시리즈는 새 국면을 맞는다. 사라는 구원자를 낳을 ‘자궁’으로서 쫓기거나 지켜지는 일이 “기분 더럽다는 걸 겪어봐서 안다”라는 이유만으로 대니를 돕고, 끊임없이 과거 자신의 존재가 어떻게 ‘지워졌는가’를 지적한다. “그들은 네가 아니라 네 자궁이 두려운 것이다”, “이제 ‘성모’ 역할은 네가 넘겨받았다”라는 사라의 말은 시스템, 즉 구조를 향한 것이자 앞선 영화들을 겨눈 것이다. 1편에서 사라는 미래 인류의 리더인 존을 낳을 모체이기 때문에 표적이 됐고, 2편에선 아들을 지키기 위해 직접 움직였다. 하지만 ‘다크 페이트’에서의 사라는 더 이상 어머니가 아니며, 그를 움직이는 건 혈연이나 모성이 아니라 ‘대상화를 원치 않는 여성으로서의 연대’다. 2편의 시간적 배경을 뒤이음에도 불구하고 ‘다크 페이트’가 ‘후속’이 아닌 전복적 ‘리메이크’에 가까워 보이는 이유다.
‘다크 페이트’는 인종, 나이, 젠더를 뛰어넘고자 하는 세 여성을 통해 ‘미래는 정해진 것이 아니며 운명은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시리즈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이어나간다. 동시에 전작들이 설정해뒀던 프레임을 ‘거슬러야 하는 운명’에 포함하고 이를 변화시키고자 한다. 터미네이터에 대항하는 대니, 사라, 그레이스는 각각 인종, 나이, 젠더를 나타낸다. 비백인의, 노년의, 사회적 성역할을 따르지 않는 여성은 이제껏 시리즈의 중심에 서지 못했던 이들이다. 혼란에 빠져 주체적으로 움직이지 못했던 대니는 그레이스로부터 “넌 미래를 구할 아들을 낳을 여자가 아니다. 네가 바로 미래다”라는 말을 듣고 나서 각성한다. 그 순간 둘을 바라보던 사라가 읊조린다. “She is John.” 여성 대명사 ‘She’가 성서의 요한이자 남성 명사인 ‘John’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명제다. 그 순간 시리즈가 줄곧 고수해왔던 설정과 함께 사회적으로 당연하게 여겨졌던 고정관념이 무너진다. 대니의 아들이 존과 같은 위치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라는 그제야 비로소 스스로 내면화했던 한계를 깨닫고, 자신을 가둬둔 프레임으로부터 벗어난다. 요컨대 영화는 이들의 가능성을 제한해왔던 과거를 자성하며, 이것이 미래로 나아가기에 앞서 선행돼야 할 전제조건이라고 말한다.
Rev-9와 T-800, 대조적인 두 양태의 터미네이터는 변화를 위해 필요한 바가 무엇인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대니를 노리는 Rev-9는 아무리 도망쳐도 끝까지 추격하고, 부수고 불태워도 다시 멀쩡해져 돌아온다. 운명만큼이나 질긴 그와의 싸움은 지지부진할 수밖에 없다. 또한 Rev-9는 형태를 자유자재로 변화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인간을 완벽히 복제하고 사회 시스템 내부로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Rev-9이 경찰, 군대 등을 손쉽게 조종할 수 있는 이유는 해당 기관들이 구조에 의해 작동되기 때문이다. 경찰과 군인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미래의 희망을 쥔 사람들을 탄압하고 제거하려 든다. 반면, T-800은 터미네이터임에도 불구하고 대니 일행을 돕는다. 명령을 수행하는 암살자는 정신적 관계로서 아내와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고 이는 전작이 ‘인간의 감정을 배워가는 로봇’으로서 끊임없이 강조했던 바다. ‘다크 페이트’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T-800을 ‘가장’의 역할을 내려놓은, ‘탈구조화’한 개인으로서 존재하도록 한다. T-800은 자신을 향한 사라의 질책과 의심을 이해하면서도, 최선을 다해 사라를 돕는다. 마침내 사라 역시 그를 ‘칼’이라 호명하며 개인, 즉 사람으로서 신뢰한다. 터미네이터의 양면은 미래를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다.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애쓰는 적이 될 것인가, 함께 연대해 운명을 바꾸는 동료가 될 것인가.
이러한 주제 의식을 가진 ‘다크 페이트’가 영화 요소 대부분을 전작에 기대고 있다는 점은 모순적이다. 미래에서 온 그레이스와 Rev-9가 대니를 찾기까지의 과정은 물론 대부분의 액션 장면, T-800이 상처 입는 부위마저도 기시감을 불러온다. 이는 1편과 2편에 대한 존경을 담은 오마주이기도 하지만, 창의성이 결여된 자가 복제이기도 하다. 전편보다 정교한 CG와 화려한 스펙터클은 요즘의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보여주는 기술 범위 내에 있는 것이고, 기발한 연출이나 독창적 플롯은 찾아보기 어렵다. 전작들이 당시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고 이후 영화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면, ‘다크 페이트’는 세 여성을 중심에 세우는 것에서 멈춘다. 1~2편을 연출하며 당시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 제임스 카메론이 각본과 제작에 참여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아쉬운 결과물이다. "60대 여성인 린다 해밀턴이 액션 리더로 등장하는 것이야말로 고정 관념의 틀을 깨는 가장 혁신적인 부분이다"라는 그의 말은 ‘다크 페이트’가 혁신을 위해 ‘여성을 앞세우는 것’ 외에 어떤 노력을 했는가를 되묻게 한다. 여성 서사의 발전은 반가운 일이며 과거 영화들이 이루지 못한 성취다. 그러나 이를 명목으로 부족한 창작력의 문제를 합리화할 수는 없다.
물론 한계가 있다 한들, ‘다크 페이트’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니다. “남성 캐릭터가 앞장서서 때려 부수고 복수하는 영화는 그동안 너무 많았다. 우리는 여성 캐릭터를 앞세워 새로운 액션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씨네21’)”라는 팀 밀러 감독의 말이 나타내듯, 영화는 여성도 미래가 될 수 있음을 지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내 온라인 커뮤니티 및 포털사이트에서,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와 ‘페미’가 묻었다”라며 영화적 완성도와 별개로 불쾌함을 표하는 자칭 ‘올드팬’들의 반응이 반증하는 것처럼, 여전히 변화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세력이 구조를 보수한다. 그러나 ‘다크 페이트’는 세기의 명대사 “I’ll be back”을 60대 여성의 목소리로 발화함으로써, 이같이 어두운 운명을 뒤로하고 새로운 미래를 제시한다. 원래 해당 대사의 주인공이었던 T-800은 가부장제적 역할을 내려놓으며 “I won’t be back”이라 말하고, 그간 지워졌던 사라는 35년 만에 “다시 돌아오겠다”라고 선언하며 미래를 기약한다. 시리즈의 지속을 기원하는 의식이자, 2편이 그러했듯 이후의 영화들에 대한 제언이다. ‘다크 페이트’가 ‘터미네이터’로서 세상에 나와야 했던 이유는 자명하다. 세계를 파멸시킬 시스템을 창조한 인간이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듯, 영화는 미래를 위해 “다시 돌아왔다.” 운명을 바꿀 모험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