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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경 Jan 05. 2022

오쿠다 사진관 (2)

정소군, 그리고 사진관의 마지막

전편에서는 오쿠다 사진관이 1910년대부터 영업을 시작하였고, 1920년에는 사진관 건물 3층에 이훈우건축공무소가 들어섰으며, 1926년에는 '사의 찬미'로 유명한 윤심덕이 하숙을 하였던 사실을 언급하였다. 윤심덕이 현해탄에 몸을 던지고 입주자를 잃은 방은 어떻게 되었을까?

《조선일보》 1926년 11월 1일자 기사에 실린 정소군의 사진

1926년 11월 1일자 《조선일보》에는 <고요한 우리 악단에 새로 비친 별 '바이올리니스트' 정소군 양>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기자는 정소군(鄭昭君, 1893~?)과의 인터뷰를 위해 그녀가 유숙(留宿)하는 수은동 오쿠다 사진관 2층을 방문하였다. 1926년 8월에 윤심덕이 사망하였고, 그로부터 약 3개월이 흐른 뒤에는 이미 2층에 정소군이 하숙하고 있었던 것이다. 윤심덕이 쓰던 방에 그대로 들어간 것인지, 2층에 또다른 방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다. 분명한 것은 윤심덕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정소군이 뒤이어서 오쿠다 사진관에 거처를 마련했다는 점이다.


정소군은 어떤 인물일까? 기사에 따르면 정소군은 진남포 태생으로 어려서부터 음악에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14, 5세 때부터 작곡을 하기 시작하였고,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제1회로 졸업했다고 한다. 1906년에 설립된 진명여학교는 1912년에 중등과를 3년제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로 인가받았다. 그녀가 진명여학교에 재학할 당시 작곡한 노래는 학교 안에서 유행할 정도였다고 한다. 1916년에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프렌치 스쿨에 학적을 두었다가 퇴학하였고, 다년간 여사무원 노릇을 하면서 바이올린 개인교습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1923년에는 수재민을 돕기 위한 재상해내지동포수재구제회에 성금 1원(元)을 내기도 하였다.


1924년, 정소군은 필리핀으로 유학을 가서 마닐라의 '필리핀대학 바이올린과'에 입학하였다. 신문기사에는 '그의 예술은 야자수 우거진 필리핀 서울에서 자라났다'고 하며 필리핀에서의 수학 경력을 강조하고 있다. 필리핀대학 바이올린과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필리핀 대학교(University of the Philippines)의 음악학교(the Conservatory: 1916년 설립. 현재는 College of Music)를 가리키는 듯하다. 당시 아직 졸업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고국 땅을 밟아야 할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1926년 9월 중순에 조선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정소군은 '조선 여자로 처음인 바이올리니스트'로 불리며, 같은 해 10월 30일에는 조선여성동우회 주최로 중앙청년회관에서 열린 노동부인 위안음악회에 출연하여 바이올린 연주를 선보였다.

바이올린을 연주 중인 정소군. 《동아일보》 1926년 11월 1일 기사.

정소군은 오쿠다 사진관 하숙방에서 기자와 대화를 나누면서, 자신이 진명학교에 다닐 대는 치마를 쓰지 않고는 학생이 문밖을 나서지 못하였는데 그동안 조선사람의 제도와 내면 생활이 많이 바뀌고 각 방면으로 여성의 활동이 격렬해진 것이 기쁘다고 하였다. 그녀는 필리핀이 세계에서 가장 음악을 숭배하는 나라라고 하면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노래를 부르고 보름달이 밝으면 가지각색의 악기를 들고 야자수 그늘 아래서 연주하며, 필리핀의 저녁은 지상낙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도, 그런 나라에 가 있는 몇 안 되는 우리나라 동포들은 생활에 얽매여 자녀 교육도 시키지 못하고 자신을 만나면 '우리 집에 피아노 좀 가지고 와서 치구려'라고 말한다고 한다. 음악이 흔한 나라에서도 악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소군은 필리핀에 있는 동안 동포들을 위해 힘써 가르치려고 하며, 조선에서도 여자든 남자든 바이올린 개인교습을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년 3월까지 가르쳐 드리겠다고 했다.


이상의 내용에 따르면 1926년 9월 중순 이후에 정소군이 조선으로 돌아왔고, 오쿠다 사진관 2층에 방을 얻은 것도 그 이후가 된다. 그런데 1926년 10월 19일, 동대문경찰서 고등계 형사 5명이 갑자기 동숭동 129번지의 주택을 수색하여 사진과 외국에서 온 서신 등을 압수하였다. 이 때 해당 집에 거주하던 여성 2명을 경찰서로 소환하여 취조하였는데, 그 두 명의 이름은 이자경(李慈卿), 정소군이었다. 이를 통해 10월 19일까지도 정소군은 동숭동에 집을 두고 있었으며, 수은동 오쿠다 사진관에는 10월 하순 이후에나 방을 얻은 것으로 여겨진다.


취조 내용은 비밀에 부쳐졌지만 이자경은 3.1 운동 당시 중국의 상하이, 베이징, 일본의 도쿄 등지로 돌아다니며 활동한 경력이 있어 경찰의 주목을 받아왔다고 한다. 정소군은 이자경의 동지로 동숭동에 동거 중인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자경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모 국장과 연락을 취하고 있는 정황이 있었다고 하는데, 정소군에게 '고국 땅을 밟아야 할 특별한 사정'이 임시정부와 관련이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후로 자세한 소식은 전해지지 않지만 언론과의 인터뷰나 공연 행사가 원활히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체포되는 일 없이 풀려난 듯하다.


정소군은 1927년 2월 12일에 평양 대성학우회 주최로 열린 신춘 음악대회에서도 바이올린 연주자로 참가하였다. 아직 학교를 마치지 않았다고 하면서 3월에는 돌아갈 것처럼 보였지만, 그녀는 4월이 되어도 아직 조선에 머무르고 있었다. 4월 16일, 조선일보사 2층에서 열린 여자외국유학생친목회에 모인 사람들은 조선 여성운동의 침체를 탄식하며 조선 안에 있는 지식계급 여자를 망라하여 조선 여자의 공고한 단결과 조선 여자의 지위 향상을 도모할 모임을 조직하자고 결의하였다. 그렇게 해서 4월 26일 근우회(槿友會)의 발기총회가 열렸는데 이때 발기인으로 참가한 사람 중에 바로 정소군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발기인으로 이름만 올리고 필리핀으로 돌아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7월 15일에 근우회의 선전 사업으로 회원이 만든 헝겊 단추를 가두에 나가서 팔았는데, 정소군도 오전 8시부터 10시까지 종로 4정목에 나가 선전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역시 필리핀으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잡지 『동광』 22호(1931년 6월)에 수록된 <반도 악단인 만평>에 따르면 정소군은 일찍이 상하이, 마닐라로 다니며 공부하여 온 조선의 유일한 여류 바이올리니스트였지만 지금은 어디 있는지 악단에서는 소식이 묘연하다고 전하고 있다. 같은 건물 3층에 건축사무소를 두고 있던 이훈우도 1929년에 조선일보사 평양지국 신축사옥의 공사 설계를 맡았다는 기사가 게재된 것을 마지막으로, 1930년대에 들어 종적을 감추었다. 이훈우는 1934년에 운니동 집을 매각하고, 1935년 혹은 1937년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늦어도 1934년 이전에는 이훈우건축공무소는 오쿠다 사진관 건물에서 나갔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쿠다 사진관 건물 자체는 어떻게 되었을까? 《중외일보》 1927년 8월 19일자 <노인의 기화(奇禍)>라는 기사에 따르면, 1927년 8월 17일 오후 2시 경에 수은동 60번지 오쿠다 사진관 2층 바깥 벽이 갑자기 무너져, 근처를 지나던 55세 김순복이라는 사람이 부상을 입어 입원했다. 물론 1928년 8월에 '사진과 당구 오쿠다' 신문광고가 나왔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 사건 때문에 건물 자체가 무너지거나 사진관의 영업이 중단된 것은 아니었다. 경성부 수은정 60 외 1필지 구등기부에는 1945년 5월 15일에 오쿠다 사진관 건물이 불에 타서 멸실되었다고 적혀 있다. 해당 등기 내용은 해방 이후인 1946년 4월 10일에야 접수되었다. 아마도 1945년 5월에 화재로 인해 건물이 소실되었고, 미처 건물을 재건하거나 사업을 복구시킬 겨를도 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해방을 맞이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쿠다 가즈요시가 그 후 일본으로 돌아갔는지, 돌아갔다면 어떻게 여생을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 가능한 정보가 남아 있지 않다.


경성의 문화 공간이었던 단성사 가까이에 위치한 오쿠다 사진관은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문물인 사진 촬영과 당구 오락을 제공하는 공간이었다. 그 건물에는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조선 근대 건축계의 유일한 기술가로 불리던 이훈우가 서양풍 근대건축 설계를 담당하는 이훈우건축공무소가 들어서 있었다. 일본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성악가로 데뷔하였던 음악인 윤심덕, 그리고 필리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였고 당시로서는 유일한 여성 바이올리니스트였던 정소군도 짧은 기간이지만 같은 건물에 거주하고 있었다. 오쿠다 사진관은 어쩌면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이 오가는 길목에서 그들의 발자국들을 간직하고 있는 공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절묘하게도 그 건물은 일제강점기의 끄트머리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왼쪽 '우신보석전문상가' 건물이 오쿠다 사진관이 있었던 자리. 2021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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