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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경 Nov 13. 2022

'귀종재흥' 당시의 지바씨 (3)

귀종이란 무엇인가

* 이 글은 2021년 6월 26일 지바시(千葉市)에서 개최한 2021년도 지바씨(千葉氏) 공개 시민강좌 〈무가정권 성립기 동국  무사의 심성: '귀종' 요리토모와 지바 일족〉에서 김현경이 강연한 동명의 강연 내용을 한국어로 번역 및 일부 정리한 것입니다.


- 지난 글에 이어서 -


다음으로 귀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귀할 귀(貴)에 씨 종(種) 자를 쓰는 단어로, 사전적 정의는 '높은 가문 출신, 고귀한 혈통'이라는 의미입니다. 단, 『아즈마카가미』의 기사에만 한정시켜 보자면 여러 대에 걸친 겐케(源家)의 가인으로서 그 귀종재흥의 때를 만났다고 하였는데, 그 귀종재흥이라는 말은 무가(武家)인 가와치 겐지(河內源氏) 집안을 잇는 고귀한 자손이 다시 일어난다는 의미를 염두에 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기사야말로 요리토모는 정말로 귀종이라고 불렸다는 근거로서 여러 차례 인용되어 왔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리토모는 정말 귀종성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요리토모의 귀종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제시되고 있는데, 천황의 혈통을 잇는다는 점, 겐지라는 점 때문에 귀종이라고 하는 의견도 물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반해 단순히 천황의 핏줄을 잇는 것만으로는, 그 당시 재위 중인 천황과의 직접적 혈연관계가 없는 한, 존귀함은 그다지 기대할 수 없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우와요코테 마사타카(上橫手雅敬) 씨는 천황의 혈통 논리로 겐지가 귀종이라고 한다면 간무 천황(桓武天皇)까지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는 미우라 요시아키나 지바 쓰네타네 같은 경우도 귀종이 되어야 할 터이며, 중앙 관직에 임명된 경력이 있기 때문에 귀종의 권리를 갖게 된다고 논하였습니다. 요컨대, 무사의 동량이 되는 첫 번째 조건이란 조정에 의해 높은 위계에 서위됨으로써 귀종임을 인증받는 것입니다.


한편, 무가의 동량의 자격을 지닌 중앙 군사귀족의 문벌 출신이므로 귀종이라고 불린다는 의견이나, 단순하게 요시아키의 주군인 요시토모(요리토모의 아버지)와의 주종관계 때문에 요시아키가 요리토모를 귀종이라고 불렀다는 식으로 한정적으로 해석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귀종에 대한 견해는 연구자에 따라 제각각 달라지며 명확하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을 아울러서 요리토모의 귀종성이라는 것이 천황의 핏줄이기도 하고 겐지 성씨를 갖고 있기도 하므로 귀종인 것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방금 '무가의 동량'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무사 사회를 통솔하는 리더, 최고 지도자로서 정점에 선 존재를 말합니다. 요리토모가 무가의 동량으로서 귀종성을 가진다는 이야기는 이 또한 『아즈마카가미』의 기사에 나오는 '요리토모=귀종'이라는 등식을 전제로 논리가 전개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도 겐지의 자손이 귀종인 것은 그 귀족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으며, 반면 미나모토(源)나 다이라(平)라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 9세기에 간토(關東) 지방에 정착하였을 당시 무사인 겐지(源氏)와 헤이시(平氏)를 천황의 자손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했으므로 귀종성을 지닌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귀종성의 근거는 천황의 혈통이라든가 귀족의 혈통과 연결되는 것이죠.


요리토모를 귀종이라고 부르는 사료는 사실 『아즈마카가미』의 이 기사 외에는 보이지 않으며, 애초에 무사를 대상으로 귀종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사례는 사료 상의 용례로서는 헤이안시대를 통틀어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 확인됩니다. 그러므로 당시 어떤 사람들이 귀종이라고 불렸는가 하는 것을 다시 제대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집필한 논문 등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해나갈까 합니다. 일본의 문헌 자료 중에서 일단 제가 확인해 본 바로는 매우 이른 시기에 등장하는 사료는 『본조문수(本朝文粹)』에 수록된 덴초(天長) 4년(827) 사료입니다. 문장생(文章生)이란 대학료(大學寮)에서 공부를 한 뒤 관료가 되기 위한 시험을 치르는 학생입니다. 덴표(天平) 2년(730) 당시, 문장생은 하급 관인이나 양민(良民) 중에서 총명하고 지혜가 있는 사람을 연령에 관계 없이 선발한다는 규정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90년 뒤인 고닌(弘仁) 11년(820)에는 3품(三品) 이상의 자손을 뽑아서 소문관(昭文館), 숭문관(崇文館)의 학생으로 삼는다는 당나라의 규정에 준하여, '양가자제(良家子弟)'를 문장생으로 삼아야 한다고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반론을 제기한 것이 미야코노 하라카(都腹赤)라는 인물로, 그의 첩(牒)에는 양가자제를 규정에서 삭제해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양가'라는 것은 '3위 이상'을 말하며, 관위(官位)를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높은 재능을 가진 사람이 반드시 귀종인 것은 아니고, 귀종이 반드시 높은 재능을 갖지는 않는다'고 하며 가문에 구애받기보다는 사람의 재능을 보고 그것을 중시해야 한다는 의견으로, 덴표 2년의 규정으로 돌아갑시다, 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여기서 '귀종'이라는 말을 정의하자면, 좋은 집의 자제들, 즉 3위 이상 관인의 자식들이라든가 자손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귀(貴)'라는 단어 자체도 율령(律令)을 보게 되면 그 형사법상의 특권을 부여받은 6개의 자격으로 육의(六議)라는 것이 있는데요, 그 육의 중 하나가 의귀(議貴)입니다. 여기서의 귀라는 단어는 3위 이상의 위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귀종이라는 말도 3위 이상의 자손이라는 의미인 것이지요. '귀'와 귀종은 3위 이상이라는 높은 위계, 그리고 그와 연동되는 관직과 관련된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에 관한 문헌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쇼타이(昌泰) 2년(899)에 우대신(右大臣)에 임명되는데요, 이 때 사표를 제출합니다. 그 사표의 내용으로 '신의 가문은 귀종이 아니고 집안은 유림(儒林)입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는 귀종 가문이 아니고 유림 집안 출신이지만, 당시 우다 천황(宇多天皇)의 발탁으로 인해 최종적으로는 우대신까지 승진할 수 있었는데, 우대신까지 승진해 버리면 주위로부터 질투를 받게 되거나 곤란한 일이 일어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미치자네는 당시 정3위 권대납언(權大納言) 관직에서 우대신으로 추임한 것입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도 마찬가지로 3위 이상에 도달했으며, 앞서 보았던 귀종의 의미를 놓고 보자면 귀종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미치자네는 자신이 쓴 다른 문장에서도, 자신의 할아버지는 지방관을 지냈는데, 자신의 가업은 지방관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하면서 자신의 집안을 설명하고 있을 때가 있기도 합니다. 그와 동시에 역시 같은 시기에 좌대신(左大臣)에 임명된 후지와라노 도키히라(藤原時平)의 후지와라씨와 대조적으로 보이려고 했던 의도가 있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후지와라씨에 대해서는 천황의 어머니쪽 친족에 해당하여 천황의 집안 사람으로서 귀종이 되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만, 그보다는 다른 귀족에 비하여 후지와라씨가 갖고 있는 탁월성이란 대대로 정치를 관장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던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후지와라씨가 천황의 집안 사람이라는 성격을 갖게 되었던 것도, 후지와라씨가 천황의 어머니쪽 친족이라는 것은 본질이 안고, 여러 대에 걸쳐 왕권에 봉사한 것과 그 공적이 거듭됨에 따라 그 포상으로서 높은 지위를 얻게 되었고, 그것이 지배층 내부에서도 납득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앞서 했던 이야기로 되돌아가면, 미치자네는 사표를 제출하지만 천황은 이를 거부합니다. 거부를 했기 때문에 두 번째 사표를 제출합니다. 그 때도 납언(納言) 관직으로 현재 자신(우대신)의 밑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장상귀종(將相貴種)'이고 '종실청류(宗室淸流)'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대체로 후지와라씨라든가 겐지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미치자네는 자신보다도 3위 이상의 위계나 공경(公卿)이라는 고위 관직을 계속해서 배출한 집안과 자신은 다르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후 오랫동안 귀종이라는 말은 그다지 사료 상에 나타나지 않는데, 12세기 무렵부터 다시 나오게 됩니다. 먼저 『주유키(中右記)』라는 귀족의 일기 속에 보이는 것이 조토쿠(承德) 2년(1098) 기사입니다. 고후쿠지(興福寺)라는 절에서 열린 유마경(維摩經)을 강(講)하는 법회에서는 수의(竪義)가 열립니다. 수의란 학승(學僧)을 대상으로 한 구두시험에 해당하는데, 문제를 내고 정답 여부를 판정하는 사람은 대승도(大僧都) 가쿠신(覺信)이라는 사람으로, 후지와라노 모로자네(藤原師實)의 아들이었습니다. 시험을 보는 사람은 가쿠주(覺樹)라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은 미나모토노 아키후사(源顯房)라는 우대신의 아들이었습니다. 이들에 대하여 일기에서 어떻게 적고 있는가 하면 사료의 마지막 문장만 읽어보면 '무릇 출제자도 그렇고 수험자도 그렇고 모두 괴문(槐門)의 귀종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괴문이란 삼공(三公) 즉 대신을 말하며, 대신 집안 사람이 귀종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그 밖에도 상급 귀족이 저택에서 시를 읊는 연회를 개최할 때, 그 연회에서 읊어진 시들의 맨 앞에 서문을 쓰는 것이 시서(詩序)입니다만, 여기에도 귀종이라는 말이 여러 군데서 보입니다. 『시서집(詩序集) 하(下)』라는 사료가 있습니다. 하권밖에 남아있지 않은데, 궁내청(宮內廳) 서릉부(書陵部)가 소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수록된 어느 시서에는 '중서시랑(中書侍郞)은 풍괴(風槐)의 손지(孫枝)이며 노극(露棘)의 귀종이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괴'와 '극'이란 삼공과 구경(九卿)을 말하며, 대신과 공경을 가리킵니다. 같은 『시서집』 안에는 조쇼(長承) 원년(1132)에 열린 후지와라노 긴유키(藤原公行)의 시 모임 시서가 실려 있는데 여기에도 '괴극의 귀종'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처럼 11세기, 12세기의 귀종이라는 단어는 대신, 공경의 가문에 해당하는 말로, 그러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하면 후지와라 북가에 속하는 모로스케(師輔)의 자손들이라든가, 무라카미(村上) 천황의 자손에 해당하는 겐지 사람들이 그 범위 안에 들어간다고 여겨집니다.


하지만 귀종이 아니라고 취급되는 경우도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히노(日野) 가문의 스케나가(資長)라는 인물이 사망했을 때, 그 자식과 손자는 중납언(中納言)과 변관(辨官)이 되어 있었는데, 귀종이 아닌 사람으로는 이러한 영광을 살아 생전에 보는 선례가 없다고 하는 이야기가 귀족의 일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말인즉슨 스케나가는 귀종이 아닌 것이 됩니다.


그 다음 사료를 보면, 연대가 조금 내려갑니다만, 안테이(安貞) 2년(1228)에 우대신 구조 노리자네(九條敎實)가 어소(御所)로 들어가 여성 관료를 만나서 그녀가 지참한 여원(女院)에 대한 배례(拜禮)의 전례에 대하여 논의를 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관백(關白) 후지와라노 다다미치(藤原忠通)는 비후쿠몬인(美福門院)이라는 여원에 대한 배례에 불참했다고 하는 이야기 적혀 있습니다. 비후쿠몬인은 '제대부(諸大夫)의 딸'이라고 불렸는데, 제대부란 공경보다 아래 레벨의 가문에 해당합니다.


* 여원(女院): 태황태후, 황태후, 황후와 그에 준하는 지위를 지닌 여성에게 주어진 칭호


또한 시치조인(七條院)이라는 여원의 아버지인 후지와라노 노부타카(藤原信隆)라는 인물도 귀종이 아닌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사람은 모로스케의 자손이지만 귀종이 아니라고 이야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대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11세기 중엽에는 공경으로의 진출이 불가능했습니다. 그 시점으로부터 나중에 집안이 공경에 복귀할 수 있었다고 해도 그러한 사람들은 '귀종'이 아닌 사람들로 구분되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귀종이라는 말 자체가 특정 상급 귀족 가문들에 대한 개념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반면, 구로다 도시오(黑田俊雄) 씨는 중세의 기본적인 신분구성으로, 귀종과 쓰카사(司), 사무라이(侍) 등 5개 신분계층을 상정하고 있는데, 그 중 첫 번째 신분이 귀종이며, 그 귀종이란 왕가(王家)와 섭관가(攝關家)를 비롯한 존귀한 가문에 속하는 계층입니다. 다카하시 마사아키(高橋昌明) 씨나 호타테 미치히사(保立道久) 씨는 귀종이라는 것은 5위 이상이라고 하며, 앞선 도야마 신지(外山信司) 씨의 발표에서도 6위와 5위 사이에 매우 중요한 차이가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그 5위부터 위를 귀종이라고 보는 분도 계십니다. 하지만 귀종은 역시 왕가와 섭관가 같은 유력 권문의 핏줄이라는 개념에 좀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다음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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