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들지 말라, 만지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은 제각기 이유를 가지고 있다. 과거 같이 일했던 변호사 존은 악수하는 것을 그렇게나 싫어했었다. "뭐 그러시던가..."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잊어버렸다. 딱히 누군가와 악수하는 것이 내게는 그렇게나 중요한 것도 아니었다. 조금 걱정이 되긴 했다. 저래서야 어디 이 일 제대로 하겠어? 사람 만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일인데...
믿거나 말거나, 예수가 부활하고 나서 맨 처음 한 말이 "만지지 말라"는 말이었다. 무덤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에게 한 말이었다. 왜 그랬을까? 이유야 많겠지만, 장-뤽 낭시는 예수가 한 이야기뿐 아니라, 그의 삶 전체가 비유로 읽힐 수 있다고 한다. 비유라는 것은 자고로 숨은 뜻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는 꼭 그렇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일단 이건 너무 헷갈리므로 패스). 왜 그랬을까?
장-뤽 낭시는 기독교의 비유와 구분되는 (이솝우화 같은) 알레고리의 특징은 "진리의 과잉성"이라고 한다. 반대로 기독교의 과잉은 "발송지점 혹은 도착지점의 과잉"이라고 한다 (20쪽).
이게 무슨 말인가? 프랑스 철학을 읽어 보려면, 무엇보다도 일단 저자가 글을 쓰는 독특한 방식을 이해해야 한다. 흔히 쓰는 기교가 단어의 뜻하지 않은 사용이다. 예상치 않은 곳에서 예상치 않은 조합으로 제시되는 단어는 일단 잠시 멈추고 뭔가 생각하게 한다. 낭시가 가장 잘 쓰는 표현 가운데 하나가 "과잉"이라는 단어이다. 진리의 과잉이란 무엇인가? 진리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발송지점 또는 도착지점이 과잉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말하는 사람 또는 듣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뜻이다. 약 100명의 청자가 있는데, 그 중 다섯 사람만 관련 있는 메시지를 전달한다고 해 보자. 나머지 95명은 과잉이다. 도착지점의 과잉이다. 그 사람들에게는 그 메시지가 의미 없다는 뜻이다.
원래 비유란 그런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인간들이 많다는 뜻이다 (13쪽). 왜 그런가? 그들에게는 그 메시지가 "허락되지 않은" 것이다 (12쪽). 약장수식으로 하자면, "애들은 가라"는 것이다.
암호도 그렇다. 예술도 그렇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왜 하지? 그는 자고로 그림은 보는 것이지 만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87쪽). 응. 나름 심오한데...
본다는 것은 "연기된 만짐"이다 (88쪽). 응? 그러니까, 만지고 싶지만 차마 손대지 못하는 것이라는 뜻이렸다. 그렇지만, 응? 좀 뜬금 없지 않니? 일단 지나가고, ...
나는 도대체 왜 이 책을 읽기로 했나? 사실 궁금했다. 기독교를 "해체"한다는 것이... 일단 해체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회 뜨는 광경이 떠오른다. 딱히 파괴도 아니고, 교살도 아니지만, 살을 발라 내고 사실상 숨도 못쉬게 해서 그냥 죽여 버리는 그런 것. 그렇지만, 그 이미지가 해체가 뜻하는 바는 아니다. 해체란,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의 문제 그 자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역사적 전망을 투명하게 그려내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기 때문에, 고정화된 전통을 풀어헤쳐 그 전통이 만들어내었던 은폐 상태를 해소하여야 한다. 우리는 이 과제를 존재 문제의 입문으로 삼고, 고대적 존재론의 전통적 형태를 해체하여 존재를 최초로 규정한 --- 그 이래로 우리를 주도하게 된 --- 근원적인 제 경험으로 되돌리는 것을 해체작업 (Destruktion)이라는 의미로 이해한다.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1927년, 오카모토 유이치로 지음, 차은정 옮김, 흐름으로 읽는 프랑스 현대사상사 (포도밭, 2015) 182--3쪽에서 재인용)
일단 첫번째 드는 생각은 우와, 진짜로 프랑스의 미친 철학의 출발점은 독일이었구나라는 생각이다. 그 다음 생각은 그러니까, 이렇게 정체가 까발려지면 나쁜 놈은, 악마는, 마귀는 그냥 도망가게 되어 있다고 하는, 그러니까, 에헴, 엑소시즘 내지는 축령 내지는 구마의식으로서의 철학이라는 생각이 진짜로 뿌리가 깊구나라는 것이다. 마치 신부님이 하듯이, 네 이름을 밝히고, 그 이름을 부르면, 다 도망가게 되어 있으니까, 철학자가 할 일은 그 이름을 찾아 내어 부르면 된다는, 아주 환상적인 발상이 다 뿌리가 있구나, 이게 그냥 프로이트나 푸코나 들뢰즈나 데리다같은 사람들만 했던 이야기가 아니었구나. 하이데거, 책 제목만 봐서 좀 심각하고 고도로 정상적인 사람인줄로만 알았는데...
여하튼 요지는 전통 속에 숨어 있는 나쁜 놈, 악마의 은폐상태를 해소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임무이고 이것을 "해체"라고 한다고 하이데거는 정했다는 것이다. 이 말을 데리다가 이어 받았다. 그는 이것을 'déconstruction'이라고 했다. 그냥 독일어의 'Destruktion'을 프랑스어로 바꾼 것이 아니다. 하이데거의 말은 '파괴'를 뜻하는, 영어로 하자면 'destruction'이고, 데리다의 말은 그 사이에 'con'이 들어간 'déconstruction'이다. 일본에서는 하이데거의 말을 해체라고 번역했으니, 이것은 같은 말을 쓸 수는 없어서 '탈구축'이라고 번역하는 모양이다. 여하튼 취지는,
[탈구축은] 폭력적인 위계서열과 관계한다. 그 해당하는 이항 속에서 한쪽이 다른 한쪽을 (가치론적으로, 윤리적으로 등등) 지배하고 높은 위치를 점한다. 그러한 대립을 탈구축한다는 것은 우선 어떤 특정 시점에서 그러한 위계질서를 전도시키는 것이다 (데리다, 입장들, 위의 책, 184쪽에서 재인용)
그러니까, 하이데거는 구조 속에 은폐한 것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는데, 데리다는 이것을 이항대립으로 바꾸었다. 그러니까 구조고 뭐고 필요 없고, 좋은 것과 나쁜 것, 높은 것과 나쁜 것의 서열을 바꾸자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뭐 어떻게 하겠다고? 왜? 그래서 뭘 하려고?
믿거나말거나, 이 동네에서는 깊게 들어갈수록, 심층적으로 들어갈수록 더 심오한 사상가라는 소리를 듣는다. 여전히. 그래서, 데리다는 언어를 건드린 것이다. 철학은 말장난이라면서? 말이 없으면 철학은 성립하지 않겠네? 자꾸 옆길로 새는 것 같아, 이건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장-뤽 낭시는 기독교를 "해체"하고자 한다. 일단 이러니, 데리다보다는 좀 덜 심오한 것 같다. 기독교는 철학이나 언어 만큼이나 심층적이지 않다. 당장 우리만 하더라도, 기독교를 해체하건, 회를 뜨건, 찜쪄 먹건, 우리와는 별 상관 없는 이야기로 보인다. 이건 교회에 돌을 던지는 것과는 다른 것 아닌가! 이것은 우리의 전통도 아니고, 따라서 별로 destruction할 이유도 déconstruction할 이유도 없고, 교회 상속이나 탈세나 부패 문제가 아닌 이상 기독교의 비유의 폭력적 이항대립이나 위계질서가 무슨 상관이라고...
일단 동의가 안된다. 그런데, 이걸 계속 읽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개인적, 내지는 직업적 관심이다. 말로 먹고 사는 직업이다보니, 논쟁과 논박과 반박에 관심이 많다. 논쟁을 하는 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논쟁의 프레임 안에서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크라테스는 사람이 아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게 안먹힌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을 해야 한다면 (종종 그런 상황에 많이 처한다), 삼단논법은 없다고 주장해야 한다. 훨씬 더 힘들다. 그렇지만 어떡하겠는가. 그만큼 절박한데... 대체로 해체에 관심이 많은 이유이다.
또 다른 이유는 푸코와 들뢰즈와 데리다 이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좀 궁금한 것이다. 장-뤽 낭시는 그 이후 사람이다. 그의 주장을 살펴 보자.
그리하여 공산주의는 정치에 속하지 않는다. 공산주의는 단 하나의 절대조건을 정치에 요구한다. 즉 공공의 공간을 함께하는 것 자체로 나아간다는 절대조건이다. 달리 말하면 사적인 것과 집단적인 것과 분리와 전체성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이처럼 '함께' 하는 것 자체의 완성에 어떤 권위도 부여하지 않는다면, '함께' 하는 것을 실체화하거나 그것을 주체로 삼는 어떤 방식이 아닌, 나아간다는 절대조건이다. 공산주의는 정치의 능동화와 한정의 원리이다. (낭시, 공산주의, 말, 위의 책 244--5쪽에서 재인용)
위 말은 공산주의는 개인에 대한 전체의 우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것은 어디든 같이 나아가는 문제라는 것이다. 그가 '해체'하는 방식은 이항대립에서 다른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대체로 제삼의 것, 특히 과정이나 관계 등을 중시하는 전략이다. 대체로 공산주의와 기독교에 관심이 많으면서, 예술과 미학에 조예가 깊은 사상가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아쉽게도 그가 쓴 '탈폐역, 기독교의 탈구축(La Déclosion, Déconstruction du christianisme, 2005)'는 아직 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것 같다. 본격적인 기독교 해체는 아니지만, 그래도 번역된 책이니 '나를 만지지 말라'에 만족해야 한다.
앞으로 다시 이야기를 돌아가서, 그는 왜 알레고리와 비유를 구분하는가? 일단은 자기 책에 대한 변명이다. 이 책은 알레고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를 만지지 말라'는 예수의 말의 숨은 뜻이나 숨은 교훈같은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 얼마나 다행인가? 요즘 큐티책이나 설교 들어 보면, 그게 뭐든 결론은 그냥 하나다. 대체로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 아, 그럴 거면 왜 그 두꺼운 책을 다 읽어? 언제나 단 하나의 교훈만 얻을 바에는?
장-뤽 낭시의 주장은 비유의 핵심은 이중, 삼중의 메시지(진리의 과잉)이 아니고, 필요한 것보다, 의도하는 것보다 더 많은 듣는 사람, 보는 사람, 읽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모두가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 다르게 말하자면, 모두가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엇을 이해했고, 무엇에 동의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해하고, 동의하는 행위이고, 그 행위를 통해 맺어지는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관계이고, 그 이후에 이어지는 사람들의 행동이다. 따라서, "진리에 대한 응답은 바로 진리와 함께 떠나는 것이다" (나를 만지지 마라, 78쪽).
낭시가 이 말에 주목한 것은, 성경 다른 곳에서는 만지지 못하게 하는 금기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심지어 "기독교는 접촉의 종교, 감각의 종교, 몸과 마음에 직접적으로 현존하는 종교를 발명했다" (위의 책 30쪽)고 말한다. 그런데 왜 만지지 말래? 그것은 부활의 본질 때문이다. 그는 말한다.
"부활은 삶으로의 복귀가 아니다. 그것은 죽음의 품 안에서의 영광이다." 부라보!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해체이다. 앞에서 공산주의에 대해 한 말과 같은 논리의 전개를 엿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개인과 전체의 대립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삶과 죽음의 대립이 아니다. 죽음의 부정이 부활이 아닌 것이다. "그를 믿는다는 것, 따라서 믿음 속에 있다는 건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걸 믿는게 아니라, 죽음 앞에서 꿋꿋한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위의 책 36--7쪽).
그는 변증법을 싫어한다. 들림이라는 말은 "죽음을 변증법속에 놓는 것도 아니고, 매개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죽음에서 어떤 삶의 진리를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위의 책 37--8쪽). 묘하지만, "죽는다"는 말은 타동사이다. 나는 스스로 죽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낭시는 말한다) "부활한다"는 말도 타동사이다. 나는 죽지 않고 죽임을 당하며, 또 부활하지 않고 부활 당한다. 뒤집어 말하자면,
"아나스타시스는 자기로부터, 즉 주체 자신으로부터 발원하는 게 아니라, 타자로부터 발원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것은 타자로부터 그에게로 온다. 혹은 그것은 그의 내부에서 타자에 속하는 것이다. 또는 그것은 그의 내부에서 일어난 타자의 들림이다. 타자가 죽은 내 안에서 일어서고 부활하는 것이다. 타자가 나를 위해 부활하는 것이지, 그가 나를 부활시키는 게 아니다" (위의 책 39--40쪽).
그러니까, 이거 다 뻥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 이게 중요하다 --- 부활은 삶과 죽음의 이항대립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은 부활하는 자와 부활당하는 자 사이의 관계 속의 사건인 것이다. 기독교 해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