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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매미 Feb 21. 2023

시간이 가르쳐 줄 거야

현경이랑 세상 읽기

* 인권연대 숨 소식지 2023년 2월호 ‘현경이랑 세상 읽기’ 꼭지에 게재된 글입니다.


     ‘못하겠구나. 더는 정말 못하겠구나.’

     엉엉 울며 깨달았다. 몸으로 느껴지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교장의 전횡(專橫)에 맞서는 과정에서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도진 나는 그렇게 1년 2개월 정도 학교를 쉬게 됐다. 2022년 3월 중순의 일이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학교에 관련된 소식을 듣거나 생각하기만 해도 며칠간 증상이 악화될 정도였다. 그렇지만 당장 퇴직을 하는 건 섣부른 결정일 수 있으니 쉬면서 천천히 생각하자고 마음먹었다. ‘복직할 것인가, 퇴직할 것인가?’란 질문을 머릿속 한켠에 구겨 담은 채 그림을 그리고 또 그렸다. 그러다 누군가 그 문제를 물으면 대답했다.

     “시간이 가르쳐 주겠죠.”


     시간이 많이 흘렀다. 2023년 2월 10일. 파리 체류 31일차 아침. 벨빌(Belleville)의 에어비앤비 아파트에서 잠을 깬 나는 아직 잠이 들어 있는 남편 곁을 조용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일기장과 스케치북을 챙겨 주방 식탁에 앉았다. 창밖 하늘은 흐린 편이었고 비둘기 떼가 이리저리 날았다. 유리창 너머 내려다 본 길목에는 출근하느라 바삐 걷거나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보였다.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일 년 전부터 계획해 준비한, 파리에서의 두 개의 개인전 중 두 번째 전시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고 이곳에서 새로 만난 사람들, 그리고 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들과의 기분 좋은 관계 속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있었다.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있었고, 가슴이 시리고 아프고 떨리는 불안 증상은 남아 있지만 스스로가 전반적으로 호전됐다고 느꼈다. 남편은 내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늘 나를 지지해 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여기서 이대로 평생 살아도 좋겠다 싶었다.

     뜨거운 차를 홀짝이며 어제 있었던 일들을 일기에 적고 어제 지출한 내역을 일기장 뒤쪽에 기록했다. 그런 다음에는 오렌지 주스를 유리잔에 따라 놓고 스케치북을 폈다. 크레용을 집어 어제 그리던 왼손 그림을 이어서 그렸다. 중간중간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씩 마셔 가면서. 오른손잡이인 내가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내 의도대로 세련되게 그어지지 않는 서투르면서도 자연스러운 선들을 찾아 살리기 위해서였다. 또한 내 의도대로 매끈하게 채색되지 않고 들쑥날쑥 채색된 거칠고 제멋대로인 질감을 내기 위해서였다. 왼손으로 그림 한 점을 완성하려면 오른손으로 할 때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내 의도대로 기민히 움직여 주지 않는 왼손에 일을 맡기다 보면 느껴지는 어떤 편안함이 있었다. 의도대로 되지 않아도 되고, 세련되지 않아도 되고, 매끈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시간이 오래 걸려도, 서툴러도, 거칠어도 좋구나. 그걸 지켜보며 느껴지는 어떤 자유로움이 있었다.

     특별한 날은 아니었다. 평소처럼 일어나 차를 마시고 오렌지 주스를 마셨고, 평소처럼 일기를 쓰고 가계부를 적고 그림을 그렸다. 평소처럼 사람들은 개똥을 피해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고 있었고 평소처럼 비둘기 떼는 하늘을 장악하고 거침없이 날았다. 평소처럼 내 왼손은 비뚤비뚤한 선을 그어 댔고 나는 그 선들이 그대로 다 괜찮고 아름답다고 느꼈다. 오렌지 주스 한 잔을 다 마셔 갈 때쯤 무언가 내 머릿속에 분명해지는 것이 있었다. 논리적 추론을 통해 도달했다기보다는 몸으로 느껴지는 명쾌함이었다. 마침 잠에서 깨어 물을 마시러 주방에 온 남편에게 나는 말했다.

     “복직할래요. 이제 복직해도 즐겁게 일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몹시 부당한 일들을 마주했고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저항했던 것이다. 그러다 입은 상처가 깊어 지쳤고 시간이 흘러 이제 다시 힘이 난 것이다. 하루하루 아쉽지 않을 만큼 마음껏 그림을 그렸고 먼 땅 파리에 와서 아쉽지 않을 만큼 마음껏 날갯짓하고 소통을 했다. 이런 순간들이 없었다면 나는 다시 힘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특별한 일은 아니다. 앞으로도 나는 하루하루 아쉽지 않을 만큼 그림을 그릴 것이고 머나먼 땅까지 마음껏 날아가 전시를 할 것이다. 부당한 일을 마주하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저항할 것이고 그렇게 서투르지만 자유롭게 살아갈 것이다. 그러다 문득, 나아갈 길이 막막할 때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시간이 가르쳐 줄 거야.”


그림_박현경, 「숲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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