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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매미 Oct 20. 2023

나의 길을 갈 것이다

현경이랑 세상 읽기

* '인권연대 숨' 소식지 2023년 10월호 '현경이랑 세상 읽기' 꼭지에 실린 글입니다.

     

      ‘교육이란 인간 행동의 계획적인 변화이다’, ‘교육이란 가르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배우는 사람의 행동이나 사고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이다’. 대학교 때 외웠던 교육의 정의들이다. 교육이 정말 그런 거라면, 나는 현재 교육을 전혀 혹은 거의 하지 않고 있다. 매일같이 중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하면서도 말이다.


      2007년에 교사가 됐으니 올해로 교사 생활 17년차다. 한때는 나도 학생들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화시키려 무진 애를 썼다. 그때는 ‘바람직한 방향’이 어느 쪽인지에 대해 어쩌면 그리도 확신에 차 있었나 신기하다. ‘바람직한 방향’에 대한 확신이 강했기에 마치 투사처럼 학생들을 변화시키려 달려들었다. 지각하는 학생은 지각하지 않게, 산만한 학생은 수업 시간에 가만히 있게, 교복 치마를 짧게 입은 학생은 치맛단을 늘여 오게, 사복 입은 학생은 교복으로 갈아입게, 염색한 학생은 다음날까지 검정색으로 머리를 물들이고 오게, 담배 피우는 학생은 담배를 끊(은 척하)게, 예의 없는 학생은 무서워서라도 (아니 더러워서라도) 고분고분 행동하게…….


      그런데 다시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때 내가 ‘바람직한 방향’에 대해 진짜로 확신이 있었는지 의심이 든다. 어쩌면 ‘바람직한 방향’에 대한 나 자신의 뚜렷한 철학이 없었기에 ‘위에서 시키는 대로’ 그러니까 교장, 교감이 하라는 대로 혹은 사회의 일반적 통념에 따라 무비판적으로 고군분투했던 것이 아닐까.


      아무튼 그런 시절을 한참 겪고 난 지금, 나는 학생들을 변화시킬 마음이 도무지 없다. 학생들이 나 때문에 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지금 모습 그대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내가 아무 지도도 하지 않고 학생들을 방임하고 있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 반 학생들은 지각하면 시를 외운다. 하지만 나는 지각하는 습관을 고쳐 놓을 생각이란 조금도 없다. 아침에 조금 서두르면 지각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내가 설명하지 않아도 학생들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도 매일같이 몇 분씩 혹은 몇십 분씩 늦는 건 본인의 선택이다. 나는 그 선택을 존중한다. 다만 몇 시 몇 분까지 교실에 도착해야 한다는 규칙도 존중해야 하므로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의미에서 시를 외우는 것이다. 어떤 학생이 일 년 내내 날마다 지각을 하고 날마다 시를 외운다면 그건 본인의 선택이다. 나는 매일 기꺼이 그 시를 들어 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 나를 ‘방임자’라고 비난할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몇 년 전엔 이런 일도 있었다. 정말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매일 삼 분씩 늦게 오는 학생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직접 내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신뢰할 만한 정보원의 제보 덕분에 잘 알고 있었다. 그 학생에게 그 삼 분의 시간은 바로 학교 오는 길 어딘가에 숨어 담배 피우는 시간이라는 걸. 하지만 단 한 번도 그 학생한테 담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매일 늦는다고 나무라지도 않았다. 그냥 꼬박꼬박 시를 외우게 하고 시를 들어 줬다. 매일 아침 그 친구가 누리는 삼 분의 끽연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할지 수긍이 갔다.


      수업 시간에 장난을 치거나, 몹시 예의 없이 구는 학생도 분명 있다. 그럴 때 나는 내가 피해를 보고 있는 부분, 즉 수업의 맥이 끊겨 힘들다거나, 기분이 많이 상한다거나 하는 걸 단호히 밝혀 말함으로써 그런 행동을 제지한다. 하지만 오늘 수업 시간에 장난친 학생이 이제부터는 장난을 치지 않게 만든다거나, 오늘 예의 없이 안하무인으로 행동한 학생이 앞으로는 공손하고 겸손해지게 만들 생각은 없다. 다만 나는 나대로 그 학생은 그 학생대로 자기 생긴 대로 생활하는 가운데 서로가 부딪치는 부분에 대해 조율해 나갈 뿐인 것이다.


      한때 내가 ‘바람직한 방향’의 하나로 생각했던 반듯한 교복 차림과 화장기 없는 얼굴, 물들이지 않은 머리에 대해서도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복장과 용모에 있어서 ‘바람직한 방향’ 같은 건 애초에 없다는 게 지금의 내 생각이다. 따라서 학생들의 복장과 용모를 어떤 방식으로든 바꾸게 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머리를 물들이고, 화장을 하고, 액세서리를 하고, 교복을 변형해 입고, 사복을 입는 것이 왜 교정해야 할 대상인지 의문스러울 따름이다. 얼굴과 머리와 옷이라는 인간의 매우 사적인 영역에 대한 규제와 교정이 군대도 감옥도 아닌 학교에서 여전히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 봤다. 그래, 나는 학생들을 어떤 일정한 방향으로 바꾸어 놓겠다는 생각이 없고, 다만 그들이 지금 모습 그대로 행복하길 바란다. 그래도 내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방향’이란 게 아예 없진 않을 거 아닌가. 나는 학생들이 어떤 사람이길 바라나. 학생들이 어떤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라나. 그리고 나 자신은 어떤 인간이고 싶은가.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는 이거다.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인간’.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굥씨 성을 가진 어떤 분이 강조하는 ‘자유’와는 전혀 다른 개념임을 밝혀 둔다.) 나는 학생들이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으로 자랐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 자신 역시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이고 싶다. 그래서 아무도, 그 어느 쪽으로도, 아무리 좋아 보이는 쪽으로라도, 밀거나 잡아당기고 싶지 않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이 글을 쓰기 시작해 이제 슬슬 하루 일과를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오늘도 지각하는 학생들이 있을 것이고 나는 시를 들을 것이다. 오늘도 장난치거나 예의 없이 구는 학생들이 있을 것이고 나는 참을 만하면 참아 주고 어느 정도를 넘어섰다 싶으면 불러서 내 입장을 밝힐 것이다. 오늘도 학교 곳곳에서 학생들을 교정하고 강제하는 목소리들이 들려올 것이고 나는, 나는 꿋꿋이 나의 길을 갈 것이다.    

  

그림_박현경, 네가 보고 싶어서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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