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경이랑 세상 읽기
* '인권연대 숨' 소식지 2023년 9월호 '현경이랑 세상 읽기' 꼭지에 실린 글입니다.
중학교 2학년 남자반 담임에 학년부장. 학교에서 내가 맡고 있는 역할이다. 뉴스를 통해 보고 듣는 온갖 사건, 사고, 정쟁과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학교 일과는 어김없이 계속된다. 그동안 나는 9월 4일 공교육 멈춤의 날 집회와 이후 이어진 또 다른 교사 집회에서 맡은 역할을 수행하고, 틈틈이 10월 단체전을 위해 그림 작업을 해 나갔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바쁜 나날이었다. 그런 가운데 담임으로서 그리고 학년부장으로서 역할에 소홀하지 않았다는 점이 다행스럽다.
아무리 중요해 보이고 대단해 보이는 일을 한다 해도 그로 인해 일상이 무너지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보도 자료를 내고, 기자들과 통화하고, 집회 성명문을 작성하고, 3만 명이 운집한 집회에서 발언을 하고, 길이 남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작품을 창작한다고 해도, 그 일들로 인해 나의 하루가 그리고 내가 마주하는 학생들의 하루가 피해를 입게 할 수는 없었다. 요약하자면, 바빴지만 짜증 내거나 대충 살지 않았다는 얘기다.
그렇게 소중히 지켜 나간, 그리고 여전히 지켜 나가고 있는 일상 중 하나가 바로 ‘지각 시 외우기’다. 십 년도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내가 담임을 맡은 반에서는 지각을 한 학생들이 벌칙으로 시를 외운다. 이 활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동시 위주로 가려 뽑아 지각한 학생들에게 한 편씩 외우게 했다. 그러다가 굳이 동시에만 국한할 것은 없겠다는 판단이 서서, 요즘은 내가 인상 깊게 읽은 시집들을 잔뜩 학교에 가져다 놓고, 그중 한 대목씩을 외우게 하고 있다.
“너무 길어요.”
“뭔 말인지 모르겠어요.”
투덜대던 중2 남학생들이 결국엔 시를 외워 내게 더듬더듬 읊어 준다. 나는 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일과 중 그 시간만큼은 다른 일을 멈추고 다른 생각도 멈추고 시를 듣는다. 그게 바로 내겐 명상이자 치유다. 명상이자 치유인 이 순간들 중, 나 혼자 읽었을 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뭔가를 느끼게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지금 네 손에 뭐가 닿는지만 생각해,
박상수, 「작은 선물」
이 두 문장을 들으며 생각한다. ‘그렇구나, 지금 내 손에 무엇이 닿는지만 생각하면 되는구나. 지금은 이 아이만 생각하면 되는구나. 한 번에 한 가지만 생각하면 되는구나.’ 그리고 마음이 급하거나 불안할 때마다 나 자신에게 읊조려 준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지금 네 손에 뭐가 닿는지만 생각해.’
그럴 수 없을 거라고 믿고 싶어도 어떤 일은 그냥 일어나기도 하는 거니까, 그 일들이 너를 미워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니까, 이제 너를 아프게 하는 것으로 세상을 벌주려 하지 말아,
박상수, 「어떤 일은 그냥 일어나기도 하지」
이 부분은 내게 몹시 큰 위로가 되었다. 과거의 어떤 일로도 나를 아프게 하지 말자. 세상이 밉다고 해서 나를 아프게 하지 말자. 그리고 동시에 이 문장들이 지금 이 문장들을 내게 들려주는 저 아이에게도 남아 언젠가 힘이 되어 주길.
그리고 문틈으로 스며드는 빛을 보았다 아주 가까이에 있는 빛을 보았다
빛의 산이 멀리 있다는 생각 때문에 한번도 들어가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희연, 「빛의 산」
이 구절을 듣는 순간 번쩍 떠오르는 것. 이 문장들을 내게 읊어 주고 있는 이 아이가 바로 ‘문틈으로 스며드는 빛’, ‘아주 가까이에 있는 빛’이구나.
복닥복닥하고 자질구레한 일상 속에서 마주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문틈으로 스며드는 빛’, ‘아주 가까이에 있는 빛’. 저 멀리 보이는 중요해 보이고 대단해 보이는 ‘빛의 산’을 생각하느라 놓치기 쉬운, 그러나 놓쳐선 안 될, ‘문틈으로 스며드는 빛’, ‘아주 가까이에 있는 빛’. 오늘도 그 빛을 놓치지 말고 살아야겠다. 그렇게 오늘의 소중한 일상이 계속된다.
그림_박현경, 「네가 보고 싶어서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