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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번여사 May 17. 2023

마쓰야마시의 낡은 아파트 후기

두려움에 저당 잡힌 영혼은 원활하게 걸을 수 없다.

숙소를 옮기고 나서 조금 쉬다 저녁이 되기 전 장을 보러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에서 사 먹는 음식에는 도대체 무슨 비밀이 들어있는 것일까. 먹을 땐 맛있는데 왜 점점 갈수록 내 위와 장은 지쳐만 가고 결국은 배앓이를 꼭 한 번씩 하게 만드는 것일까? 여기 아파트에서 지내는 동안은 사 먹지 않고 지내보려고 한다. 계란도 삶아 먹고 토란도 구워 먹고 오이도 씻어 먹고 당근도 데쳐 먹고. 과일도 깨끗이 씻어서 껍질째 베어 먹고. 이렇게 쓰다 보니 그야말로 자연인의 삶인데?


동굴 속으로 들어와 웅크리고 앉아 있으려면 비상식량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장바구니를 메고 미리 탐방하면서 봐뒀던 식료품 가게들을 찾아갔다. 토란 여섯 개나 일곱 개 들이 한 바구니에 100엔, 100엔이면 이때는 천원도 안 되는 돈이었다. 비록 가늘긴 하지만 오이 세 개가 100엔, 당근 세 개 한 봉지 100엔, 고구마 한 봉지에 100엔, 여긴 뭐 채소판 백엔샵인가 채소판? 질이 무척 좋은 상태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그리고 지금의 나로서는 이 상태가 최선의 선택 상황이라 여기며 감사하게 샀다.


여기 아파트로 오기 전에 지나치던 꽃 가게가 생각나서 찾아갔다. 그리고는 귀엽고 앙증맞은 연보랏빛 꽃을 탐스럽게 뽐내는 녀석을 하나 샀다. 내가 지내는 이 공간을 이 녀석이 단박에 생기를 가득 넣어주며 살려낼 것이다. 잘 부탁한다. 이름 모르는 꽃아. 정말 이 꽃은 그 공간에서 나에게 큰 기쁨을 내내 주었고 나중에 그 집을 나올 때는 공원에 가서 화단에 심어주었다. 잘 크고 있는지 궁금하다.


다른 가게로 가서 계란도 한 줄 샀다. 탄수화물용으로 밥과 유부초밥 몇 개를 사고 반찬으로는 연근과 우엉조림이 들어있는 것을 골랐다. 이제 편의점에 들러 생수와 이온 음료만 사서 돌아가면 된다. 아, 여기에 오면서 샀던 귤 세 개 한 봉지에 100엔짜리를 하나 더 사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가 없어 4층까지 낑낑거리며 올라왔지만 내 손으로 직접 음식을 해 먹는다는 생각에 이런 힘듦쯤이야 하며 기분 좋게 올라왔다.


당장 계란을 삶고 당근도 데쳤다. 물론 오이도 씻고 오렌지도 껍질을 까놓고. 여행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죽염을 꺼내서 솔솔 뿌려 먹었다. 세상에나 이렇게 맛있을 수가! 어머나 속이 편해라! 먹는데 내 몸이 이전처럼 또 사 먹는 음식이냐며 잔뜩 찡그리지 않음을 진하게 느낀다. 몸이 좋아한다. 몸이 고마워함을 느낀다. 맛있어서 먹고 또 먹고 실컷 먹었더니 그득한 포만감도 느껴지고, 위도 장도 나도 모두 즐겁다.


이렇게 자연인으로 사는 게 내 몸은 가장 잘 맞는 체질인가? 식사할 걸 찾아 나서는 일이 당분간 며칠은 없어도 된다. 그냥 이것만으로도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모든 재료의 맛을 하나하나 음미하며 먹는 이 맛, 지쳐가는 몸에 큰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사 온 꽃에 물을 흠뻑 주며 책상 위에 올려놓으니 정말 온 집안이 화사하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최고로. 한밤중 우당탕탕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두려움에 저당 잡힌 영혼은 원활하게 걸을 수 없다.


첫날밤, 열한 시가 넘어가고 열두 시가 다 되어가는데 밖이 요란하다. 술 취한 남자들의 난동 부리는 소리가 들린다. 말리는 건지 앙칼진 여자의 소리까지 이어진다. 무언가를 깨부수는지 쳐 부수는지 하여튼 우당탕탕 소리. 그 소리들이 새벽 한 시가 다 되어가도 멈추질 않는 기묘하고 기이한 상황. 일본에서? 그런데 왜 사람들이 신고를 하지 않지? 하는 생각이 더 큰 의문으로 일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이 낡은 아파트에 거주하거나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서는 내가 아무것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그렇다고 내가 신고를 할 수도 없고. 여기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 사실까지 인지되자 더욱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우당탕탕 쿵쾅쿵쾅에 고래고래 고함지르는 소리의 참사는 상당히 오래 지속되었다. 아, 내가 도대체 어디에 와 있는 것인가! 오늘 잠이나 잘 수 있으려나?


자연인의 밥상으로 저녁을 먹을 때까지만 해도 그리 좋던 공간이 당장이라도 버리고 싶을 만큼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잠을 설친 첫날밤을 보내고 밝은 아침을 맞이했지만 내 몸과 마음은 어찌나 심란하던지 일어나기가 싫었다. 내가 지낼 낡은 아파트라는 공간 자체는 쓸고 닦고 물 팔팔 끓여 소독해서 지내면 된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내가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것 아닌가. 이러니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실감하며 이곳으로 옮긴 내 결정이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에 몹시 기분이 씁쓸했다.


오전 내내 의기소침으로 밖으로 나가기가 싫어 영화를 보며 딩굴거렸다. 글도 잘 써지기는커녕 이미 물 건너갔다. 무서움에 저당 잡힌 영혼이 무슨 글을 쓴단 말인가. 이후 나는 이 공간에서 지내는 5일 동안 노래는 커녕 글도커녕, 그저 매일 느지막이 일어나 점심을 간단히 먹고 슬그머니 나가 오후 시간을 밖에서 보낸 뒤 일찌감치 들어와 저녁을 먹고 영화보다 자곤 했다. 밖으로 나갈 때도 혹시 무서운 사람들과 마주칠까 봐 은근 긴장하기도 했다. 그렇게 여기 있는 동안 영화 몇 편 본 것과 오후 시간을 모두 할애해 도고 온천에 다녔던 것 외에는 한 것이 없다. 처음에 거의 책 한 권 쓸 것 같은 거창했던 포부가 무색할 만큼 내 아이패드의 노트는 텅텅 비어있었다. 홀가분하게 고치시로 떠날 때까지 그 상태는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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