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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번여사 May 22. 2023

시코쿠 순례길 , 치쿠린지를 향해서

순례길 체험 제대로 한 날

금요 시장에서 먹거리를 잔뜩 산 뒤 이제 이날의 세 번째 일정인 치쿠린지 절을 향해 출발했다. 치쿠린지는 고치시의 유명한 절이다. 이쯤에서 왜 생뚱맞게 다니지도 않는 절을, 시코쿠 여행 와서 한 번도 가지 않은 절을 가겠다는 것인지 궁금할 수도 있겠다. 내가 시코쿠를 제일 처음 알게 된 건 시코쿠 순례길을 통해서였다. 시코쿠에는 총 88개의 절이 있다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나이가 들거나 무언가 필요에 의해 마치 인도 사람들이 죽어서라도 강가에 가고 싶어 하는 것처럼 시코쿠의 88개 절을 순례하길 원한다고 했다. 그런데 그것도 특정한 사람들의 이야기인지 젊은 일본 친구에게 물어보니 자신은 모른다고 그게 뭐냐고 나에게 되려 물었다. 그러면서 자신보다 일본에 대해 더 잘 아는 것 같단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그보다 일본의 더 많은 도시들을 여행했더라고.


하여튼 일본에도 산티아고처럼 좋은 순례길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섬나라의 청정하고 아름다운 대자연을 만나볼 수 있는 순례길 영상은 나에게 무척 흥미로웠다. 그래서 워낙 걷기 좋아하는 나는 남편이 퇴직하면 꼭 같이 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중에서 31 번째 절이 고치시에 있으니 이번에 미리 시찰하듯 한번 가보면 어떨까 싶었다.


치쿠린지는 금요시장에서 자전거로 40분 거리에 있었다. 걸어서 갔다면 왕복 다섯 시간은 넘게 걸려 포기했을 텐데 나에게는 자전거가 있다. 당연히 용감하게 도전해 보기로 한다. 아마도 나는 초행길이기 때문에 구글 지도를 켜서 계속 확인하면서 가야 되기 때문에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릴 것이다. 빨라도 1시간에서 1시간 반은 걸릴 걸로 예상했다. 처음엔 순조롭게 잘 찾아갔다. 그러다 애매한 구간이 나타났다. 지도상으론 맞는 것 같은데 끝까지 가면 길이 막혀 있다.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했다. 날은 더운데 슬슬 지치려고 한다.


치쿠린지는 고치시내와 다리로 연결된 섬들 중의 하나의 섬안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분명히 건너가야 할 다리가 나타나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자꾸 엇갈렸다. 이런 비루하기 그지없는 공간감각미숙자 같으니라고. 그런 길치가 전 세계를 나돌아 다니며 여행하는 것은 어메이징 그 자체다. 그나마 자전거로 다니니 잘못된 길이라도 다시 돌아 나오기가 편해서 그다지 힘들지는 않았다. 시간과 에너지를 좀 썼지만 드디어 다리를 찾아서 건너게 되고 치쿠린지가 있는 섬으로 향했다.


한 고비를 넘기고 신나게 다리를 건너는데 풍경이 예술이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화창하다. 길 잘못 들어 들어갔다 나왔다 하며 갸우뚱거리던 좀 전의 어리바리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지금은 그저 기분 좋고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만이 존재한다. 어제 일기 예보를 확인할 때 분명히 오늘도 또 비가 온다고 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가! 이렇게 틀려주는 일기 예보는 봐줄 만하다. 그러나 반대로 화창할 거라 해놓고 비 오면 왕 짜증.


오 마이갓! 그런데 다리를 건너와 섬 입구에서 표지판을 보니 치쿠린지 절로 향하는 길은 산으로 올라가는 길이다. 더군다나 그 길은 경사가 아주 가파르고 긴 길이여서 도저히 자전거를 타고 올라갈 수는 없다. 걸어서도 힘들겠구먼 이 자전거를 가지고 어떻게? 더군다나 바구니엔 장을 본 음식들도 가득인데? 이런 세상에나 어제에 이어 나는 왜 모든 것이 산속에 있을 거라는 걸 예측하지 못하는 것일까? 어제 공원은 생각을 못할 수도 있다고 쳐도, 아니 절은 가만 생각하니 산속에 있는 게 보편타당한 사고 아닌가!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야 하는데 태양까지 강렬하게 내리쬐는 이 한낮에... 상상하니 너무 힘들 것 같다. 그래서 포기했다. 빠른 포기는 정신건강에 아주 이롭다. 그 대신 기껏 왔으니 섬마을이나 돌아보자로 계획을 변경했다. 마을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자전거를 다시 힘차게 밟았다. 섬 마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가 좋잖아? 절대로 정신 승리 아니다. 정말 마을이 예뻐서 그렇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공원이 보이길래 그 아래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과 몸을 식혀준다. 가져온 생수로 금요 시장에서 사 온 먹거리들을 가볍게 행군 뒤 먹기 시작했다.


어묵이 정말 맛있었다. 몸 건강 생각해서 먹는 거 아니면 절대 안 먹었을 당근도 생으로 와그작와그작 씹어먹고, 딸기도 먹고, 토마토도 먹었다. 자전거를 신나게 타고 와서인지 모두 다 꿀맛이었다. 그렇게 실컷 먹고 일어나서 섬마을 더 돌아보려고 하는데 마음속에 변화의 물결이 몽글몽글 피어오른다. 사람이 배부르고 시원하고 기분 좋은 상태가 되니 이렇게 사고가 유연해지는 것인가? 너그러운 품성과 용감한 기운마저 솟아오르는 것인가? 아무래도 매번 보는 똑같은 일본 집들을 보는 거보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힘들겠지만 그래도 치쿠린지 절을 도전해 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기특한지고.


그런데 이 자전거가 문제다. 그렇게 고맙게 생각하며 신나게 타고 왔건만 이젠 거추장스럽기 이를 데 없는 천 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처음엔 마을에 잠깐 주차해 놓고 얼른 절에 다녀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자전거를 어디에 세워 둬야 될지 마을 곳곳을 다녀봐도 신통한 곳이 나오질 않았다. 내 자전거도 아니고 호텔에 서 빌린 자전거이기 때문에 잃어버리는 불미스러운 사고가 생긴다면 아,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고치 시내에는 자전거 주차장이 잘도 구비되어 있더구먼 이 섬마을인 눈을 씻고 봐도 없다. 고민하다 에라 모르겠다 일본 자전거의 자물쇠 시스템은 가히 세계적이다고 말해도 될 만큼 이리 견고한데 설마 잃어버리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산으로 오르는 입구에 세워 두기로 했다. 그래도 약간은 찝찝한 마음이 남아 있었지만 홀가분하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구불구불 산길을 한참 오르다 표지판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가서 지도를 확인하니 치쿠린지 절까지 자전거를 끌고 가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코린지 절 옆에 아주 멋진 식물원이 있는데 그것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절을 본 뒤 식물원으로 곧장 가서 보고 바로 다른 길로 바로 내려가면 된다. 그런데 나는 자전거를 산 입구에 세워 놨으니 결국 다시 돌아서 내려와 자전거를 끌고 또 올라가야 하는 일이 벌어진다는 계산이다. 그렇다면 올라갈 때 좀 힘들겠지만 자전거를 가지고 간다면 식물원도 보고 곧장 다른 길로 내려가면 되니 여러모로 그것이 효과적이고 영리한 선택이다.


힘들게 지금껏 올라왔지만 과감히 멈추고 다시 산 아래로 내려간다. 그것이 미래를 위해 훨씬 큰 도움이 될 테니. 자전거는 그대로 있었다. 내가 일본 사람들을 너무 못 믿었나?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날의 날씨는 햇볕이 쨍쨍 인 마치 한 여름 과도 같은 뜨거운 날이었다. 헉헉거리면서 자전거를 끌고 올라갔다. 숨이 턱턱 막히며 내가 지금 이 나이에 이러고 있을 일인가? 이거 나의 수명을 단축하는 짓 아닌가? 나는 왜 이렇게 매번 올림픽 금메달감으로 용감한 것일까? 등등 별 생각이 다 스쳐 지나갔다. 더불어 많은 차들까지 내 옆을 스치고 지나간다. 자전거를 끌고 가는 사람은 유일하게 나 혼자다. 심지어 걷는 사람도 없다. 순례길이라며 왜 걷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것인가?


마치 고행을 부러 수행하는 엄격한 수행자 같다는 생각까지 들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영화 미나리에서 본 십자가를 끌고 가는 남자의 모습처럼 지금의 나의 모습이 딱 그거 아닌가 하며 킥킥거렸다. 그렇게 웃고 나니 신기하게도 힘든 것이 좀 사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래 웃음은 가장 강력한 묘약이다. 나는 이 참에 나의 마음속에 염원하고 있는 목표들을 기원하면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산속에 있는 모든 영험하고 좋은 기운들이 나의 목표와 꿈을 향해 전진하도록 격려와 힘을 불어넣어 주시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니 즐거웠다. 그렇게 힘들지도 않았다. 물론 그때 당시는 힘든 줄도 모르고 그 먼 산길을 올랐지만 지나고 나서 며칠 동안 후유증으로 고생을 좀 했다. 오르고 또 오르고 드디어 치쿠린지 절에 다다랐다. 실로 눈물겨울 만큼 감동스럽고 감격스러웠다. 나에게도 치쿠린지에도. 절로 오르는 입구에 자전거를 세워 두고 고즈넉한 절을 한 바퀴 돌았다.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 만큼 멋스러운 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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