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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가모모씨 Aug 19. 2021

실수 은행 | 지은 글

某某씨 지음

안녕하세요 나는 실수 은행의 은행원 다람쥐 입니다.


모든 사람은 실수 은행에 실수 통장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요. 실수를 할 때마다 실수 통장에 빚이 조금씩 생겨납니다. 우리는 통장에 이런 실수 빚을 기록하지요. 이렇게요.


11/23,  -500, 늦게 일어남


보통은 하루에 한 개 이상의 실수 빚이 생겨요. 그렇지만 실수를 잊어버리거나, 실수를 기억하더라도 마음에 상처로 남지 않게 되면 통장에서 빚이 지워집니다. 이걸 ‘실수 빚을 갚는다’고 하지요. 빚을 갚으면 통장에서 내용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내용 위에 한 줄을 그어 지우는 표시를 합니다. 이렇게요.


11/23, -500, 늦게 일어남


그래서 우리는 손님의 모든 실수 기록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작은 실수는 빚이 금방 없어지지만, 큰 실수는 굵은 글씨로 빚이 새겨질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날 수록 글씨가 굵어지기도 하지요. 그래도 대부분의 실수는 시간이 지나면 통장에서 잉크가 바래요.


사람들은 실수 은행도, 실수 통장 몰라요. 실수가 너무 싫어서 실수 은행이 있다는 사실도, 실수 통장이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거든요. 그래도 우리는 열심히 통장을 관리하지요.


실수의 종류에는 여러가지가 있어요.

금방 잊혀지는 작은 실수들도 있지만, 생각하면 괜시리 얼굴이 빨게 지는 실수도 있고, 평소에는 하지 않을 실수를 하기도 하지요. 몇 년간 빚으로 남아 버리는 실수도 있고, 평생 갚지 못하는 실수도 있답니다.




실수 은행에서는 고객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실수를 단 한 명의 은행원이 전담해서 관리합니다. 저는 8살 동윤이의 통장을 관리해요. 동윤이는 매일 수많은 실수를 저지르고, 수많은 실수가 지워지지요. 저는 그래서 매일 매일이 너무 바빠요.


오늘도 동윤이는


늦잠을 잤고,

뛰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도 하고,

소시지만 먹고,

동생한테서 장난감을 뺐고,

밤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어요.


그럴 때마다 동윤이는 후회하며 엉엉 울었답니다.

그렇지만 내일이 되면 또 동윤이는 통장에 적힌 실수를 잊어버리고 같은 실수를 반복할 거에요.

하도 같은 실수를 반복해서 달달 외울 정도라니까요!


사실 제일 바쁜 건 옆자리의 거미 씨 입니다.

거미 씨는 16살 지율이의 통장을 관리해요.

중학생 누나, 형들의 담당 은행원이 제일 바쁘답니다.

크고 작은 실수들이 연이어서 벌어지거든요.

얼마나 일이 많으면 실수를 기록할 다리가 8개나 되어요!

얼마 전에는 지율이가 좋아하는 오빠 앞에서 우스꽝스럽게 꽝! 넘어져서 실수 빚이 되었어요.

심지어 굵은 글씨로 금액도 엄청 크게요!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넘어졌던지 웃을 틈이 없던 거미 씨도 이번엔 엄청 크게 웃었답니다.




저는 가끔 동윤이 엄마, 아빠를 담당하는 황소 아줌마, 개미 아저씨와도 얘기를 나눕니다. 실수 빚을 실수 없이 기록했는지 체크하기 위해서죠. 아줌마와 아저씨는 이 일을 오래 했는데, 그들의 말에 따르면 어른이 되면 자기가 잘못하지 않아도 실수가 되는 일이 많아진대요. 실수인지 헷갈리는 경우도 많아지고요! 그래도 경험이 많은 은행원들은 이게 실수인지 아닌지 빠르게 결정할 수 있답니다. 저도 그런 좋은 은행원이 되고 싶어요.


요즘 동윤이네 엄마, 아빠 통장에 가장 많이 올라오는 빚은 동윤이에 관한 거래요.

동윤이한테 많이 화냈을 때,

아침에 헤어지면서 우는 동윤이와 차갑게 인사 했을 때,

동윤이가 원하는 걸 들어주지 못했을 때,

매일 매일 굵은 글씨로 빚이 되어 올라온대요.


회사에서도 매일 실수 빚이 올라온대요.

회사에 지각을 하거나,

중요한 일을 잊어버리거나,

사소한 실수를 할 때,

매일 매일 굵은 글씨로 빚이 되어 올라온대요.


이렇게 매일 매일 큰 빚이 생기는 데도

동윤이 엄마도 동윤이 아빠도 동윤이처럼 엉엉 울지는 않았어요.

다시 씩씩하게 일을 하고 동윤이와 웃으며 인사하지요.


하지만 동윤이는 그런 엄마, 아빠의 속도 모르고 또 실수를 저질렀어요.

그래서 황소 아줌마와 개미 아저씨한테 괜히 쟤 좀 어떻게 해보라는 잔소리를 들었답니다.

그렇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실수를 통장에 남기는 일 뿐인걸요.


그래도 굵은 글씨로 적힌 실수 빚은 갚고 나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거나, 같은 실수를 하더라도 빚이 적어져요.

사람은 후회와 반성을 하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빚을 갚지도 않고 늘려놓기만 하기도 한답니다.




아, 또 해줄 얘기가 있어요. 사실 모든 사람은 죽는 순간에 잊어버렸던 실수 은행을 기억하고 찾아온대요. 참 신기하지요?


갓 태어난 정훈이를 담당하는 나무늘보 씨는 사실 얼마 전까지 동윤이 할아버지 통장을 관리했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동윤이 할아버지도 죽기 직전, 처음으로 실수 은행을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실수 통장을 보았답니다.


동윤이 할아버지는 그 두꺼운 통장을 한 장, 한 장 정성껏 읽었습니다. 어떤 때는 껄껄 웃었고, 어떤 때는 눈물을 흘렸지요. 대부분의 실수는 지워졌지만, 몇몇 개의 실수는 굵은 글씨로 남아있었어요. 통장의 내역을 다 확인한 동윤이 할아버지는 나무늘보 씨한테 이렇게 얘기했대요.


“이보게. 나는 항상 실수하는 게 무서웠다네. 실수를 항상 싫어했지. 그런데 이렇게 모든 실수를 보고나니, 실수들 하나하나가 전부 나 자신이지 않은가. 다 지나고 보니 이 실수들이 하나하나 다 사랑스럽구먼. 나는 이제 나를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네. 이 많은 실수를 이 오랜 시간 동안 잘 관리해주어 고맙네.”


그리고는 나무늘보 씨의 손을 한번 맞잡고는 아주 편한 얼굴로 다시 먼 길을 떠나셨대요. 실수 통장을 손에 꼭 쥔 채로 말이죠!


사람들은 실수가 너무 싫어서 실수 은행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지만, 실수 은행의 모든 은행원들은 손님이 자신의 실수 통장을 사랑하길 바란답니다. 바로 동윤이 할아버지처럼요! 그래서 오늘도 실수 은행은 쉴 새 없이 돌아갑니다.

 



자, 여러분도 이제 곧 실수 은행을 잊어버리겠지요? 흔한 동화나 상상 속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이 실수 은행을 잊기 전에 자신의 실수 통장을 한 번쯤 상상해보면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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