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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가모모씨 Aug 19. 2021

쓰다, 라는 행위의 의미 | 겪은 글

某某씨 씀

어릴 때부터 손에 힘이 없었던 나는 처음 글씨 공부를 할 때부터 연필을 잡는 것이 어려웠다. 내가 국민학교 저학년 때만 해도 모든 숙제는 손으로 써가는 것이었다.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부모님 손을 잡고 박물관이나 서울의 5궁 같은 걸 둘러보고, 필름 카메라로 찍고, 인화하고, 사진을 붙이고, 글씨를 써서 숙제를 완성했다. 그럴 때면 손가락과 손목이 너무 아팠던 기억이 있다.


모든 서류를 손으로 작성하던 그 당시만 해도 예쁜 글씨는 꽤 인정을 받는 것이었다. 학교에서는 매년 경필쓰기 대회가 열렸다. 글씨가 예뻤던 동생은 매년 학년 대상을 싹쓸이했다. 반대로 나에게 글씨란 예쁜 것은 고사하고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수준으로 쓰면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엄마는 나를 붙들고 매일매일 쓰기 연습을 시켰고 나에게 쓴다는 것은 매우 괴로운 일 중 하나가 되었다.


학년이 올라가자 여자아이들은 친한 친구들과 우정일기를 교환했고, 좋아하는 남자애가 생기면 러브장을 만들어 선물하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표지에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육공 다이어리와 색색깔의 반짝이 펜이 유행했다. 최대한 예쁜 글씨로 심심한 줄 공책을 복잡하고, 특이하고, 정성 있게 탈바꿈하는 아이들은 반의 주목을 받곤 했다. 글씨도 못쓰고 미적감각도 제로였던 나에게 그런 문화는 참으로 적응하기 어려웠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 집집마다 PC라는 게 들어왔다. 프린트기도 함께였다. 점차 인터넷선을 까는 집들도 생겨났다. 중학교에 들어갈 즈음에 야후나 다음, 라이코스 같은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어를 치는 것만으로 숙제를 완성할 수 있었고, 채팅 사이트였던 아이러브스쿨이나 세이클럽에서 학교나 반이 갈라진 친구들과 연락을 이어갔다. 그 이후엔 메신저라는 게 생겨 매년 새로운 반 친구에게 이름과 함께 버디버디 아이디를 물었다. 중 3 즈음엔 반 아이들 대부분이 휴대폰을 손에 쥐게 되었다. 격동의 시기와 함께 대부분의 숙제는 프린트물로 대체되었고 우정일기니 러브장이니 하는 것은 마치 고대 유물처럼 여겨졌다. 내 글씨의 목적은 “정보 전달”에서 “나만 알아볼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꼭 손으로 해야하는 것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공부 같은 것이 그랬다. 나는 글씨를 잘 쓰지는 못했지만, 써야만 외워지는 불운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인강이라는게 나타난 이후에도 펜은 손에서 놓을 수 없게 되었다. 대학에서는 글씨 쓸 일이 더더욱 줄었지만, 시험 공부만큼은 꼭 손으로 써서 하고는 했다. 핵심이 되는 것들은 펜으로 체크하고 손이 아플만큼 쓰고 되새기지 않으면 내 것이 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붙들려 앉아 글씨 연습을 했던 부작용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였다. 글씨의 저주였다.


결국 나는 회사를 다니는 지금까지도 예쁜 글씨를 갖지는 못하게 되었다. 스마트한 이 사회도 더이상 나에게 쓰는 행위를 바라지 않게 됐다. 그럼에도,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쓰는 게 좋다. 괴발개발한 글씨지만 남의 말을 받아 쓰는 것도 좋고, 그걸 다시 들여다 보는 것도, 내 생각을 덧붙이는 것도 좋다. 회의 때면 “뭘 그렇게 쓰니”라거나 “그렇게 다 쓰면 나중에 보니”하는 말을 듣기도 하지만, 그런 얘기를 들으면서도 결국 펜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나는 이제야 내가 쓰는 행위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다.


나중에 보려고 쓰는 건 아니다. 써놓은 걸 들춰보는 일은 드물다. 다만 끄적이는 행위로 나는 정보를 내 뇌 속 서랍에 차곡차곡 쌓아둔다. 쌓다가 정돈을 하기도 하고 갖다 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내 것이 되고 내 생각이 된다. 그래서 나는 글의 개요를 정리할 때나 생각이 진전되지 않을 때만큼은 컴퓨터를 덮고 폰도 내려놓은 채 종이에 뭐든 써내려 간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이란 참 어릴 때의 경험이 중요하다.


요즘 친구들은 레포트를 쓸 때 폰을 들고 말을 한다고 한다. 그러면 핸드폰이 알아서 음성을 글씨로 바꿔 준단다. 즉흥적으로, 조리 있게 말하기 어려워하는 나는 그런 애기를 들을 때마다 머릿속에 퀘스천이 가득하다. 그럼 생각을 어떻게 정리하는 거지? 컴퓨터로 글을 쓰고 난 후에도 빨간 펜으로 고칠 곳을 체크하는 나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나같은 사람에겐 엄청, 엄청 대단해 보인다. 지금 초등학생인 친구들은 아마 나와는 다른 사고구조를 갖고 자랄 것이다.


내가 더, 훨씬 더 나이가 많이 먹어 누가 봐도 어르신 같아 보이는 나이가 되면 나는 그 친구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반대로 그 친구들은 저 할머니는 촌스럽게 뭘 자꾸 적어대 할지도 모르겠다. 사회에서 “써야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필요 없다”며 나를 외면할지도. 그럼에도 나는 쓴다는 행위가 주는 그 감각을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태블릿 PC도 주지 못하는 어떤 안정감이다. 종이와 펜이 만나면서 느껴지는 마찰감. 종이를 넘길 때 느껴지는 저항감. 글씨도 못 쓰면서 펜을 드는, 그런 촌스러운 할머니가 될지라도 나는 그런 것들을 죽을 때가지 버릴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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