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세
하늘을 동경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이지만, 그 끝에 도달했을 때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대개 허무이거나 혹은 감당할 수 없는 파멸의 힘입니다. 그리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1986년 작 <천공의 성 라퓨타>는 바로 그 지점, 즉 인간의 가장 높은 이상과 가장 낮은 탐욕이 맞닿은 경계선을 소년과 소녀의 눈을 통해 집요하게 추적하는 작품이죠. 그러니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 영화가 낡아 보이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여전히 기술의 풍요 속에서 정서적 빈곤을 겪으며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무대인 라퓨타는 그 모습부터 거대한 모순의 상징입니다. 하부 구조는 대지를 초토화할 수 있는 강력한 고대 병기로 가득 차 있지만, 상층부는 이름 모를 꽃들과 이끼, 그리고 새의 알을 보호하는 로봇병이 있는 고요한 정원으로 이루어져있죠. 이는 문명이라는 동전의 양면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신의 영역에 도전하며 쌓아 올린 기술은 그 자체로 경이롭지만, 그것이 생명을 향한 온기를 잃고 권력의 도구로 전락하는 순간 인류를 위협하는 괴물이 된다는 사실을 미야자키는 로봇병의 무기질적인 눈을 통해 서늘하게 증명합니다.
주인공 파즈와 시타의 여정은 단순히 잃어버린 성을 찾는 모험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고독의 무게를 나누어 짊어지는 과정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하늘을 바라보는 파즈와, 왕가의 핏줄이라는 무거운 운명을 비행석이라는 작은 돌에 담아 목에 걸고 다니는 시타는 서로의 손을 맞잡음으로써 비로소 땅을 딛고 설 용기를 얻습니다. 이들이 구름을 뚫고 라퓨타에 도착했을 때 느끼는 감정은 금은보화에 대한 환희가 아니라, 주인 잃은 정원을 묵묵히 지키고 있는 로봇병에 대한 연민과 700년 동안 방치된 문명의 고독에 대한 경외감을 선사합니다.
악당 무스카는 이와 대척점에 서 있는 인물입니다. 그는 고대 문헌을 낱낱이 파헤쳐 기술을 통제하고 권력을 쥐려 하지만, 정작 그 성을 지탱하고 있던 '생명력'은 보지 못하는 장님과 같습니다. 때문에 시타가 무스카에게 던지는 "사람은 흙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일침은 이 영화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철학을 드러냅니다. 아무리 화려한 공중 도시라 할지라도 대지와의 연결을 끊어낸 문명은 결국 죽어버린 화석에 불과하다는 경고로 기능하는 것이죠. 이는 버블 경제의 초입에서 끝없는 성장을 꿈꾸던 당시 일본 사회와, 디지털의 가상 공간으로 끊임없이 도피하려는 현대인들 모두에게 유효한 준엄한 꾸짖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의 절정인 '바루스(Balse)'는 흔히 멸망의 주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해방의 주문에 가깝습니다. 파즈와 시타가 함께 외치는 이 짧은 단어는 탐욕의 근거지가 된 라퓨타의 무거운 무장들을 털어내고, 그 안에 갇혀 있던 거대한 생명의 나무를 하늘 높이 띄워 보냅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멀어져 가는 라퓨타의 윗부분을 보며 우리는 기묘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는 건 그것은 소유할 수 없는 것을 소유하려 했던 오만에서 벗어나, 생명이 그 자체로 존속하게 두는 '비움의 미학'을 목도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찾아야 할 라퓨타는 저 먼 구름 속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딛고 선 이 땅의 흙냄새와 곁에 있는 사람의 체온 속에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니 파즈와 시타가 작은 비행정을 타고 지상으로 돌아가는 뒷모습 위로 흐르는 주제가는, 비행석이 우주 끝까지 올라가더라도 우리 마음속의 순수한 동경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약속하듯 영화를 보고 난 뒤 우리가 느끼는 여운은 라퓨타가 비유한 대지와 자연이 더이상 정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보호하고 함께 살아가야 할 대상이라는
걸 깨우쳤기 때문이겠죠.
_현이버스 l 영화 유튜브 채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