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밤

캐나다 옐로나이프 250217-250222

by 현정

밖은 여전히 밝은 밤이었다. 가만히 카메라를 들고 서있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손가락 끝이 동상에 걸릴 확률이 높다는 가이드의 말이 자꾸만 떠올라 잠시 티피 안으로 몸을 피한 참이었다. 티피는 커다란 원뿔 모양의 천막으로, 검색해 보니 과거 원주민들의 집이었다고 한다. 아, 물론 지금 내가 몸을 녹이고 있는 이곳이 원주민이 사용하던 그것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건 그냥 오로라 빌리지의 감성을 한껏 끌어올리기 위한 조형물이자 추위에 약한 남쪽 사람들의 몸을 녹여줄 대피소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지금 캐나다 옐로나이프에 와 있다. 캐나다 중에서도 꽤나 북쪽, 도시 전체에 인구가 2만 명밖에 살지 않는다는 시골 마을이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전라북도 장수군이나 강원도 양구군 정도가 인구 2만의 도시라고 한다. 이름조차 생소한 지구 반대편의 시골 마을에 와 있는 이유, 그렇다.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


운명 같은 일이었다. 자연의 섭리랄 게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 아니, 오로라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내가 지금 여기에 와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우주나 별, 천문학 따위에는 관심도 없던 내가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읽게 되었고, 함께 《코스모스》를 정주행한 사람들과 책거리로 천문대를 방문했고, 천문대 가이드의 별자리 해설과 정확하게 맞아떨어진 밤하늘에 매료되어 버렸고, 어쩌다가 오로라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과학책방 “갈다”에서 사람들을 모집해 오로라 여행을 떠난다는 걸 알게 되었고, 1년간 모은 적금이 만기를 앞두고 있었고, 회사에 일주일 정도는 휴가를 낼 수 있을 것 같았고, 마침 올해는 태양의 흑점 극대기로 오로라를 볼 수 있는 확률이 매우 높다고 하고. 그렇게 작은 계기가 쌓이고 쌓여 어느 날 나는 밴쿠버행 비행기에 앉아있었던 것이다. 이걸 운명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논할 수 있겠는가.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자꾸만 일어나는 2025년이다. 더 정확하게는 평소의 나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을 자꾸만 하게 된 지난 두 달이었다. 생전 하지도 않던 소개팅 제안에 OK를 남발했고, 어느 새벽에는 갑자기 사회인 합창단을 검색해 가입하기도 했다. 열 시간 넘는 비행은 해본 적도 없으면서 덜컥 캐나다로, 그것도 경유까지 해야 하는 이 작은 도시로의 여행을 질러버렸고, 우주에는 관심도 없으면서 남들의 버킷리스트인 오로라 보기를 체험해 보겠다고 이 추운 곳에 와 있다. 새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외향형 인간이라고 나를 소개하는 재미를 깨달았고, 그러면서도 문득 느껴지는 부끄러움에 눈알을 굴리기도 자주 했다. 읽지도 않던 소설책에 계속 손이 가고,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평소의 나 같지 않아 어색하기만 하다. 새로움에 연신 부딪히면서 나는 나 조차도 모르겠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삼십 대도 절반을 흘려보낸 서른다섯이 되어서일까. 아니면 지금껏 똑같은 삶을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빠가 늘상 말했던, 진짜 어른이 되는 나이라는 서른넷을 지나서일까.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도 괜히 나는 2025년이 반가웠다. 아직 두 달밖에 살아내지 않았지만 2025년의 나는 조금 더 용감해지고, 조금 더 사람을 사랑하게 된 듯하다. 덕분에 조금 더 (많이) 거지가 되었고, 조금 더 방탕해졌다. 열 달 뒤의 내가 여전히 이런 모습일지는 잘 모르겠다. 그때 가서 이 글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꼭 오로라 사진을 함께 꺼내봐야지.


오로라 빌리지에서는 개인 조명 사용이 허락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관측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곳은 어쩐지 어둡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새하얀 눈 바닥에 비치는 오로라의 빛 때문인지, 어둠에 금세 적응해 버리는 인체의 신비 덕분인지는 잘 모르겠다. 강한 오로라가 내리쬘 때면 눈밭에 나란히 누워 연신 감탄만 내뿜는 옆사람의 속눈썹이 보인다. 오로라를 가득 담은 사람의 얼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나는 아마 그 옆얼굴을 잊지 못할 테다.


또다시 티피 밖이 밝아지고 있다. 화목 난로 앞에 옹기종기 모여 손을 녹이던 사람들도 하나둘 장갑에 손을 끼워 넣고 다시 밝은 밤으로 향한다. 나는 식어버린 핫초코를 마저 마시고 벗어두었던 방한 마스크를 쓰려다가 이내 내려놓고 티피 문을 나선다. 잠깐이라도 온 얼굴에 오로라를 담고 싶어서. 나의 오로라 빛 속눈썹이 누군가의 마음에 담기길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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