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도시락
아이의 겨울방학을 맞아 무얼 해볼까 고민하던 차 공공서관 홈페이지에서 ‘독서교실’ 홍보문을 보게 되었다. 방학 중 3일, 출석을 모두 하면 국립 중앙도서관에서 수료증을 준다는 문구에 마음이 혹했다. 어떻게로든 의미가 남겠지 싶어 신청일에 알람을 설정해 두었다. 신청 당일 정각 10시가 되어 신청 버튼을 눌렀다. 2초? 3초? 정상적으로 신청이 되었다는 문구를 확인하고 메인 화면으로 돌아가니 정원이 다 차 있었다. 이렇게 경쟁률이 높다고? 놀라움도 잠시 신청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드디어 오늘, 독서교실 첫날이다. 방학전부터 이번 겨울 방학은 짧기도 하고, 제주 여행 말고는 다른 계획이 없으니 매일같이 도서관을 다녀오라 일렀었다. 흔쾌히 수락하는 아이에게 ‘1000페이지 챌린지’까지 꼼꼼하게 들락날락 거릴 장치까지 마련했다. 걸어서 15분 내외로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지만 혼자서 처음부터 걸어가 본 적은 없어 내심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제 막 10살이 된 아이는 8살 때도, 9살 때 달랐듯 그전보다 더더욱 달라져 있었다. 도서관 아닌 어디든 잘 찾아갈 아이라는 걸 온몸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아이를 믿어주는 건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다. 수업이 끝나면 피아노 학원이 오픈하는 시각 사이에 1시간 남짓, 붕 뜨는 시간이 있다. 틈새 시간, 점심을 해결해야 오후 학원 스케줄을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다. 생각 끝에 아이에게 도시락을 싸줄까 물으니 아이가 물개박수를 친다. "완전 좋지!" 도시락 하면 현장학습 때 싸주었던 이벤트 도시락이 전부지만, 아이가 기억하지 못하는 순간들 속에 도시락은 나에게 단순한 밥 한 끼의 의미를 아니다. 그런 도시락을 다시 아이에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나의 핵심기억 속에 저장되려고 한다.
학기 내내 친하게 지낸 친구와 만나기로 했다며 친구가 먹을 도시락도 혹시 모르니 준비해달라는 아이. 솜씨는 없지만 간단하게 먹을 밥 정도야 못 싸겠냐 싶어 기쁜 마음으로 볶음밥을 만들고, 다디단 감을 예쁘게 깎아 도시락통에 담았다. 책벗뜰에 수업이 있어 함께 집을 나섰고, 자그마한 배낭을 멘 아이가 폴짝 폴짝 뛰어 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나중을 기다렸다.
나는 수업이 끝난 후 러닝을 하며 아이의 연락을 기다렸다. 이쯤이면 연락이 올 것 같은데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없다. 러닝이 끝나고 책벗뜰에 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아이에게 전화를 했다. 조용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은 아이는 이제 막 휴게실에 앉았다며 도시락을 먹을 준비를 한다고 이야기했다. 오냐오냐, 맛있게 먹으렴, 기분 좋게 전화를 끊고 한 컵 그득 부어 놓은 물을 꿀꺽 꿀꺽 마셨다. 잠시 후, 아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엄마, 도시락 너무 맛있어!’
아이가 혼자서 먹고 있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그럼에도 혼자 먹냐고 묻지 않았던 건 내 손을 떠난 도시락의 쓰임과 아이가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쓰든 괘념치 않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설령 혼자서 먹는다고 해도 전연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걸 아이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맛있게 먹어 우리 딸! 답장을 보내고 컵라면에 부을 물을 끓였다. 잠시 후 아이의 전화, 이제 도서관을 나선다는 아이의 말에 시선이 한 방향으로 쏠린다. 뿌듯하고 예뻐 죽겠는 마음을 숨기며 좀 이따 보자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저 멀리, 아이가 내려올 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아이가 보인다. 아주 천천히 걸어 내려오는 아이는 저 멀리, 저만큼 멀리 있어도 전혀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에게로 걸어오는 아이는 몇 시간 사이에 훌쩍 커 있었다. 어쩌려고, 어쩌려고 저렇게 예쁘게 크는 건지. 엄마 가 없이 저홀로의 외출에 아이는 내심 얼마나 설렜을까. 도시락을 싸준다는 엄마의 말에 발그레 웃던 아이. 친구를 만나기로 했지만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싸준 도시락을 저 혼자 휴게실 테이블에 얹어 놓고 옴폭 옴폭 먹었을 아이. 와중에 엄마에게 맛있다는 따뜻한 인사까지. 자기만큼 예쁘고 작은 도시락을 다시 챙겨 넣고 배낭을 짊어졌을 아이. 혼자서도 얼마든지 제 할 일을 스스럼없이 해내는 아이.
아이는 내일도 도시락을 싸달라고 한다. 도서관 가는 날은 소풍 가듯 도시락을 싸주기로 한다. 그 시절의 내가 작은 락앤락 통에 주먹밥을 넣어 다니며 아이와 세상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던 그때처럼 아이도 자신 앞에 펼쳐질 모든 시간과 공간을 든든한 도시락을 믿고 푹 빠져들어 보기를 바란다.
그런 아이에게 왜 혼자 먹었냐, 친구는 왜 안 왔냐, 넌 혼자 먹어도 괜찮냐 따위를 묻지 않는다. 그때의 나도 너는 왜 아이를 혼자 데리고 다니냐, 애는 친구 하고 놀아야 하지 않느냐, 너 혼자 그렇게 애쓸 필요 없다는 말 따위를 다 뿌리쳤듯 아이도 스스로를 믿고, 구애 없이 세상 속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도시락. 내 삶에서 육아만큼 중요하고 소중한 도시락. 지금 그대들에게 작은 도시락을 선물바란다. 그대 앞에 놓인 새로운 세상의 뚜껑을 지금 바로 열어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