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글쓰기1
“엄마, 우유 없어?” 식탁에 앉은 조카가 묻는다. 바로 옆에 앉은 큰조카, 그러니까 우유를 찾은 조카의 누나는 말한다. “없어, 그냥 먹어.” 정말이지 별 것 아닌듯한 대화였지만 순간, 말려 있던 두루마리가 풀어지듯 마음 속에서 뭔가가 탁, 하고 풀어졌다.
이제 곧 5학년이 되는 조카는 남자아이다. 이제는 초기사춘기에 접어들어 행동거지가 얌전해졌지만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만 해도 제법 말썽꾸러기였다. 투정도 많고, 반항도 많고 무엇보다 자기중심적인 아집이 많았다. 본심은 착한 아이고, 누군가를 해코지 할 요량으로 악한 마음을 갖는 아이는 분명 아니었지만 전반적으로 스스로를 제어하는 힘이 부족하고, 가르칠 것이 적지 않은 아이였다.
그런 아이를 보며 늘 걱정 스러웠지만 육아관이 다른 언니에게 가타부타 언질을 주기도 뭣했고, 실제 듣기 좋든, 싫든 육아에 관한 조언을 건넸을 때 부정적인 감정만 챙겨가는듯 양육의 본질은 꿰뚫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했다. 그렇게 자란 아이가 어느덧 12살. 이제와 아이의 한마디로 그간의 시간들에 어떤 문제들을 야기하고 있었는지를 뒤늦게나마 알아차리게 해주었다.
자라오면서 나이텀이 많은 누나 형 사이에서 자란 아이는 큰 누나와 자그마치 11살이라는 나이 차이를 두고 태어난 늦둥이다. 늦둥이라 응석받이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뒤늦게 태어난 아이는 육아의 마지노선을 넘은, 이를테면 더이상 육아가 아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리매김 하고팠던 언니에게 이전과는 다른 육아였을 것이다. 모든게 다 버거웠다고 말하는 언니에게서 그것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능히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그렇게 철저하게 막둥이인 아이는 스스로 해결 하거나 지레 포기해 버리거나, 그것도 아닐때는 사사로운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대부분의 지점에서 거부와 경시를 겪었을 것이다.
단순한 ‘우유’에서 지난 시간을 떠올린 것은 그간 미처 다 인지 하지 못했지만 무수한 찰나 속 아이에게 내뱉는 그 가족들의 말들에서 계속해서 풍겨져 나오고 있었다. 가족들의 거절과 거부가 부지불식간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우유를 주지 못하는 이유가 불명확했다. 지금 없어서 못준다는 이유는 지난 시간 속 어린 아이에게는 분명 쉬이 납득되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어떻게 아이가 말하는 걸 일일이 다 들어줘요? 다 들어주라는 말이 아니다. 들어줄 수 있는 걸 최대한 들어주었을 때 어떤 일들이 생겨나는지 분명히 알려줘야 할 것 같아 보태는 말이다. 우유가 먹고 싶은 아이에게 우유를 사다 주지 못할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매번 아이의 욕구를 가벼이 여기고 “그냥먹어”, “그냥 해”는 너의 욕구나 주장, 너의 마음과 생각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는 사실을 꼭 알아야 한다.
돈이 없어 우유를 사줄 수 없는 것이라면 상황을 설명하고 아이에게 동의를 구해야 할 것이고, 우유를 먹을 수 없는 사유가 분명하다면 그 이유를 한번 더 각인시켜 지금은 우유를 먹을 수 없지만 몸이 다 나으면 사 줄 수 있다고 다음을 꼭 약속해 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유를 사 줄 수 없는 이유가 ‘단순히’ 지금 내가 사러 나가기 귀찮은 이유라면 그건 정말이지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단순하게 우유로만 생각하면 안된다. 아이가 먹고 싶어하는 우유를 사 준다는 건 너를 생각하는 마음을, 네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을 보여주는 일이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우유를 사줄 수 없을 때는 그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없는 걸 왜 찾아. 그냥 있는 거 먹어’는 자신의 마음을 내보인 아이에게 니 마음 따위는 전연 중요하지 않다는 말로 들릴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건,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 하다는 것. 매 순간 아이는 저지 당하고, 무시당했을 것이다. 어른들은 기분 좋을 때만 자신의 욕구를 들어주고, 조금만 불편하고 불쾌하면 언제그랬냐는 듯 무시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의 욕구를 말하는 아이에게 부디 우유를 사다 주길 바란다. 아이가 말한다고 다 들어주는 것이 아닌 들어줄 수 있는 것을 응당 당연하게 들어주는 것. 아이가 하는 말이 결코 ‘쓸데 없는 말’이 아니라는 걸 아이가 꼭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대부분의 욕구들을 충족시켜 주었을 때 일어나는 일은 간단하다. 욕구가 거부되었을 때 그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타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말로 안되니까 안된다는 걸 구태의연하게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아이는 스스로 깨닫고 더이상의 떼를 쓰거나 말꼬리 잡거나 대들지 않는다. 간단한 욕구들은 최대한 들어주길 권한다. 안되는 이유가 ’귀찮은‘ 이유에서라면 다시 한번 꼭 생각해보길 바란다. 나중에 더 귀찮은 일들에 허우적대기 전에 지금부터라도 작은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을 하는 네가 너무나도 중요하고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매 순간 깨닫게 해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