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

내가 있는 장면

by 책사이애


모텔씬, 어색한 남녀가 서로의 상의 단추를 하나 둘 풀고 있다. 입을 맞췄던 것도 같고, 남자 주인공의 납작한 복부 근육도 눈에 들어온다. 여자 주인공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고드는 남자 주인공의 숨소리가 거칠고, 목을 뒤로 넘긴 여자 주인공의 눈빛이 허공을 향한다. 잠시 후, 마치 정신이 들었다는 듯 표정이 굳은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을 저만치 밀어 쳐낸다. 좁은 모텔 방안에서 튕겨져 나가떨어진 남자 주인공 옆에 전등갓이 찌그러진 스탠드가 눈에 들어온다. 남자 주인공의 상복부도, 당황스럽지만 모든걸 이해할 수 있다는 듯한 자애로운 눈빛도 둘 사이에서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도 그 순간만큼은 전등갓보다 더 유의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한번 더, 이 영화를 본 것에 대한 환희와 동시에 단 하나의 장면을 획득한, 고로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쓴 나는 그제야 온 몸으로 전율한다.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보는 일은 궁극의 몰입을 선사한다. 다시 보는 화면과 대사 중 그 어느 하나 익숙한 것이 없다. 익숙한 것에서 익숙함이 없음을 발견하는 일은 영화의 시작과 끝 사이에서 단 한톨의 장면도, 대사도, 음악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요, 완벽한 몰입이다. 올 가을 N번째 보는 영화 ‘만추’에서 내가 느낀 감동은 이전과는 전연 다른 것이었다. 남녀 주인공의 사이와, 그들이 들어 앉은 공간, 그 공간을 가득 매운 숨빛과 눈빛에 온 마음을 들었다 놓았던 내가 이번에는 찌그러진 전등갓과 침대와 화장대 사이의 간격에 새삼 눈길이 닿았다. 저렇게 좁은 공간에서 사랑을 나누겠다고 서로에게 얽히니 작은 진동에도 흔들릴 수 밖에. 나가 떨어진 남자 주인공이 처음 찌그러뜨린 것이 아닌게 분명한 낡은 전등갓은 찌그러진 그것 대로가 본래의 모습인 듯 익숙했다. 전등갓 본연의 용도는 뜨겁고도 강렬한 빛을 은은하게 바꿔 주는 것이 목적일 지언데 저 좁은 공간 속 전등갓은 서로를 은은하게 비춰주는 용도의 물건이 아닌 누군가의 울분과, 화, 괴로움과 슬픔을 대신 가려주고 있는 초라한 방안의 유일한 소품이다.


늦은 밤, 내일의 일정을 염두할 여력 없이 2시간 가까이 영화에 몰입한다. 늘 같은 장면에서 눈물이 터지는 건 영화 속 어느 장면에 언젠가의 내가 반듯하게 들어 앉아 있기 때문이다. 한편의 영화 속에서 언젠가의 나를 찾아 보는 일. 추억을 더듬기 위해 사진첩을 뒤적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영화 속에 내가 있으니 언제라도 그때의 나를 만날 수 있다. 올해의 ‘만추’와 내년의 ‘만추’는 전연 다른 영화일테니 다시 또 만나는 ‘만추’는 내 삶의 어느 순간을 모조리 잡아채 갈 것이다.


덧,

작고 작은 세상, 가릴 것 없고 숨을 데 없던 남루한 사랑이 찌그러진 전등갓에 다시금 살아난다. 그때의 사랑이 슬픔이 되었다면 그 영화속 침대와 화장대의 거리처럼 우리 사이가 쓸데없이 가까웠기 때문이고, 그럴 수 밖에 없었던 건 우리가 가진 것이 단하나의 전등처럼 없어도 그만일, 그래서 더욱 더 갖고 싶었던 유일한 빛이 서로에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서로를 밀쳐내느라 상처 입었고, 튕겨져 나가 떨어지는 일이 많아지자 온 몸이 멍들었다. 우리를 비춰주던 유일한 빛은 어느새 제 모습을 잃었고, 그것이 본디 무엇이었는지도 잊을만큼 볼품없어진 스탠드처럼 우리가 나눈 시간은 볼품없이 구겨졌다.


글로채움 '몰입'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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