쪼꼬를 만나러 가는 길
크리스마스이브. 예정일을 18일이나 앞두고 있었다.
오후 5:30쯤, 침대에 앉아있는데 몸에서 액상의 무언가가 밖으로 왈칵 새어 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화장실에 갔더니 옅은 핑크색 액체가 속옷을 적시고 있었다. 핑크색 액체는 곧 투명한 액체로 바뀌었는데 주체가 안될 정도로 계속 흘러나와서 욕실 바닥을 흥건히 적셨다.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가는 중에도 계속해서 줄줄 흐르는 통에 방바닥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말았다. 옷을 갈아입는 것도 별 의미가 없었다.
헐, 이것이 말로만 듣던 양수가 터진 거구나...
진통은 아직 없었다. 병원에 전화를 하니 1-2시간 안에 와서 입원을 하라고 했다. 우선 시부모님과 친정부모님께 알린 후 가볍게 샤워를 했다, 입원을 하면 샤워를 한동안 못할 거니까. (병원에 전화를 했을 때 샤워를 하고 천천히 와도 된다고 했다.) 그리고 아직 미처 다 못 싼 출산 가방을 부랴부랴 싸서 병원으로 출발했다.
I am not ready yet ㅠㅠ
(마음의 소리: 우어아ㅇ양아에양우어야우아)
차 안에서 멘붕이 온 나는 계속 이 말을 되풀이했다.
오후 7:30쯤 입원을 했다. 미국 산부인과에는 입원실과 분만실이 따로 없고 입원한 방에서 분만까지 진행한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방은 1인실이고 꽤 넓었다. 정확한 사진은 없지만 대략 이렇게 생겼다. 흔들의자와 샤워실, TV가 구비되어 있고, 천장엔 수술할 때 필요한 조명과 다른 기구(?)들도 설치되어있는 것 같았다. 그때까지도 양수는 계속 줄줄 흐르고 있었는데 느껴지는 진통은 여전히 없었다.
옷을 갈아입고, 아기 심장박동과 진통을 측정하는 기계(?)를 배에 부착했다. 양수가 터진 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검사를 하고, 자궁문이 얼마나 열렸는지도 측정했다. 간호사가 자궁문이 1cm 정도 열렸다고 했다. (자궁문이 10cm 열려야 분만을 진행할 수 있다. 무통주사는 보통 4cm 열린 후부터 맞을 수 있다.) 진통은 이미 진행 중이었지만 다행히(?) 아직 내게 느껴질 정도는 아니어서 사진을 몇 장 찍는 여유를 부려보았다.
오후 10:00쯤, 자궁문을 부드럽게 한다는 cervidil을 투입했다. 12시간 동안 경과를 지켜보고 진행이 더딘 경우 12시간 후에 자궁수축제인 피토신을 주겠다고 했다. 양수가 터지면 24시간 안에 출산을 해야 한단다, 유도를 해서라도. 아기가 양수 없이 오래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오후 11:00쯤부터 생리통과 같은 통증이 슬슬 시작되었다. 처음엔 이게 진통인가, 아니면 투입한 약 때문에 오는 통증인가 긴가민가했는데, 곧 진통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프긴 했지만 못 견딜 정도의 고통은 아니었다. 출산의 고통이 끔찍이도 무서운 나머지 열심히 연습해 둔 호흡법으로 호흡을 하니 3-4시간 정도는 견딜 만했다. 새벽 2:30에 진통제 옵션에 대해 살짝 문의를 했더니 3:00쯤 간호사가 와서 자궁문 열린 정도를 체크해보고는 "2-3cm 정도 열렸는데 무통주사(epidural)를 놔줄까?" 하고 물었다. 무통주사는 4cm 이상 열려야 주는 줄 알았는데, 벌써 준다고...?! 싶었고, 왠지 모르게 무통주사를 너무 빨리 맞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아직은 좀 더 버틸 수 있을 것 같으니 조금만 더 있다가 받겠다고 했다. (내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을까 싶다. 진통이 어디까지 강해지나에 대한 쓸데없는 호기심이었나?;;) 간호사가 무통주사는 요청한다고 바로 맞을 수 있는 게 아니고 30-40분 정도가 소요되니 그 점을 고려해서 요청을 하라는 팁을 주고 나갔다.
새벽 3:30, 간호사가 돌아간 후 30분 만에 무통주사를 요청했다. 웬걸, 정말 기다리는 데에 40분 정도가 걸렸고, 그 사이 진통의 강도가 매우 급격하게 올라갔다. 무통주사를 맞기 15분 전과 맞고 있는 와중, 주사의 약효가 퍼지고 있는 첫 5분, 총 25분가량은 진통이, 그리고 아래를 누르는 강한 압력이 견디기 몹시 힘들었다. 진짜 더는 못 참겠다는 생각이 들 때 주사의 약효가 퍼지며 모든 통증이 사라졌다. 이걸 무통 천국이라고 하는구나. 난 왜 30분 일찍 간호사가 주사를 준다고 했을 때 냉큼 받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ㅠ
주사를 맞은 직후에 자궁문 열린 정도를 보니 8cm!!! 주사를 요청하고서 받을 때까지 소요된 40분 동안 자궁문이 3-4cm에서 8cm까지 열렸고, 나는 그 진통을 쌩으로 견뎠던 것이다. 30분만 더 호기를 부렸다간 의도치않은 자연주의 출산을 할 뻔.
그래도 한편으론 더 이상은 못 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까지 한 번 가본 것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다행히 버텨야 했던 시간이 길지는 않았기도 하고. 한 번은 겪어봤으니 둘째 때는 미련없이 빨리 주사를 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새벽 4:20, 무통주사를 투입한 이후부터는 일이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얼마 안 돼서 자궁문은 모두 열렸는데 쪼꼬의 심장박동수가 잘 잡히지 않았다. 쪼꼬가 상황을 잘 견디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한 의사 선생님이 아기를 빨리 꺼내야 한다고 했고, 바로 분만을 준비했다.
새벽 5:00에 분만을 진행했고, 5:13 am, 단 3번의 힘주기 만에 쪼꼬가 세상에 나왔다...!!! 무통주사 때문에 나는 힘을 잘 주고 있는지 몰랐는데 의사 선생님이 잘하고 있다고 얘기해주었고, 순식간에 쪼꼬가 턱! 하고 내 가슴팍에 얹혀졌다. TV에서 죽을 힘을 다해 오랫동안 힘을 주며 아기를 낳는 엄마의 모습에 익숙했던 나는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끝나버린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서 감동할 겨를도 없었다.
그렇게 2020년 12월 25일 새벽 5:13,
예정보다 3주 일찍, 크리스마스의 선물처럼 쪼꼬를 만났다. 입원한지 약 10시간, 진통을 느끼기 시작한지 약 6시간만이었다. 내 걱정과는 달리 비교적 순탄한 출산이었다.
쪼꼬를 처음 만났을 때의 감정은 감동과 벅차오름보다는 안도와 얼떨떨함이었다. 보자마자 첫눈에 반한 건 모르겠고, 귀여워서 안심한 기억이 난다. 아기를 낳았는데 내 눈에 못생겼으면 어쩌나 진심으로 걱정을 많이 했었기 때문이다;; "귀엽잖아!"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가슴을 쓸어내렸다 ㅎㅎ 그리고 모성애는 모르겠고 별다른 문제없이 건강하게 태어났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감동보다는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서 그런지 내 뱃속에서 꼬물거리던 생명체가 진정 얘가 맞는 건지, 연결이 잘 안 되고 실감이 안 났다. 현실감이 없다고 해야 할까. 옆에서 남편이 눈물을 흘리고 나는 남편을 달래주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그래도 건강하게 태어나 준 쪼꼬에게 고맙고 대견한 마음이 가장 컸다. 앞으로도 건강하게만 커달라고, 그리고 잘해보자고 마음속으로 얘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