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5월 1일 화요일. 이등병 딱지를 뗀지 15일 되는, 자대 배치를 받고 채 한 달이 되지 않은 날이었다. 내 군생활은 시작부터 순탄치 않았다.
“00중대 모든 선임 분들께 한 말씀 올립니다.
어제 어느 병장이 말하길 저에게 불만이 있는 선임들이 여럿 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몇 자 적습니다.
우선, 저에게 불만이 있으신 분들은 저에게 직접 와서 말씀하시기 바랍니다. 뒤에서 숨어있지 말고, 어떤 점이 자신이 보기에 잘못된 것 같은지 직접 1대 1로 대화한다면 더욱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 대한 불만으로 심성 착한 저희 00처 선임 분들이나 00 맞선임 분들을 괴롭히진 않았으면 합니다. 혹 이런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정말 졸렬한 행위로 스스로 부끄러워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당당하게 저와 직접 해결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 또한 마음속에 담아뒀다가 뒤로 신고하는 스타일은 아니니, 편한 마음으로 와서 얘기하시면 들어드리겠습니다.
덧붙여 오해를 푸는데 도움이 될까 싶어, 기본적인 제 철학 몇 가지를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존중합니다.
어떤 사람이 대령이라고 해서 더 존중하지도 않고, 병사거나 후임이라고 해서 덜 존중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서울대 출신이라고 해서 (더 대단하지도 않을뿐더러) 더 대단하게 보지도 않고, 대학을 안 나왔다고 해서 무시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국회의원 앞이라고 고개를 더 숙이지도, 평범한 시민 앞이라고 고개를 덜 숙이지도 않습니다.
반면,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지위가 낮아도 정말 존경할만한 인성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섬기며,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그 지위와 책임에 걸맞는 언행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함부로 고개를 숙이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이 내면의 힘이고, 이런 힘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멋진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가르침을 주신 분들께 항상 감사하며,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또 그렇기 때문에 저는 높은 사람이나 선배들이 쓰레기를 치우는 등 궂은 일을 한다고 해서, 이미 충분한 인원이 그 일을 하고 있는데, 무슨 큰일이라도 났다는 듯이 달려가 그 일을 제가 대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한국식 과잉충성으로 참으로 불필요한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제가 맡은 일은 확실하게 합니다. 이곳에 온 이후에도 처음해보기에 미숙한 일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일을 전문성 있게 해왔습니다.
몇몇 선임 분들이 저에 대해 가지고 있는 불만사항들이 위와 같은 저의 기본 철학을 바꿔야 해결되는 것들이라면, 미안하지만 저는 바꿔드릴 생각이 없습니다. 이럴 경우, 안타깝지만 우리 둘 중 한명이 전역하기 전까진 서로 불편을 감내하고 지내야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외에 제가 잘못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면 당당하게 와서 말하십시오. 받아드릴 것은 받아드리겠습니다.
끝으로 한 가지 말씀드립니다. 2017년 9월 28일, 국군의 날 행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국군 장병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국방의 의무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몸도 마음도 더 건강해지고 성장해서 가족의 품, 사회로 돌아가야 할 임무가 있습니다.”
대통령이 그날 말한 ‘건강’은 신체적 건강뿐만 아니라, 21세기 대한민국 사회에 기여할 수준, 또는 최소한 우리 사회를 후퇴시키지 않을 정도의 사고방식과 정신적, 사회적 건강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두가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타대대와 비교할 때 우리 00중대의 좋은 분위기를 고맙게 생각하는데, 이런 글을 써야하는 상황에 까지 이르게 되어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
이 글이 올라가고, 우리 중대는 발칵 뒤집혔다. 이 글은 최대 조회수를 기록하고, 우리 중대를 넘어 다른 대대 병사들에게까지 이메일로 퍼졌다.
부대 배치를 받고 예상보다 사람들이 착해서, 그래도 시대에 따라 군대도 변하긴 변하구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두 달 뒤에 전역하는 한 병장을 포함하여 몇몇 정말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선임들이 몇 명 있었다. 말투에서부터, 자기 앞에 앉아있는 후임 자세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등 말 같지도 않은 이유로 시비를 거는 것이나, 또 그런 지적을 받으면 무슨 큰 죄라도 지었다는 듯 움츠리는 후임들이나, 그 꼬락서니를 보고 있는 내가 답답해 한번 일을 내지 않고서는 못 살 것 같았다.
이런 말을 하면 동기들은, “야, 걔 어차피 두 달 뒤 전역인데, 그냥 놔 둬” 했다. 하지만, 그 인간들이 저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사회로 돌아가는 걸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한 번 집고 넘어가지 않는 이상, 자신의 서열이 올라감에 따라 그런 모습을 보고 배우는 사람들,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입장을 바꿔가며 이 사회를 후퇴 시키는 사람들은 계속 생겨날 것 같았다.
하지만 약자가 강자에게 덤빌 때는 적당한 명분을 챙기고, 시기 또한 봐야하는 법. 무작정 개겼다가는 공감도 못 받고, 이제 1개월 남짓 여기서 일하며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나만 죽는 꼴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맘에 안 드는 병장들에게 적당히, 하지만 꾸준하게 까칠히 굴며, 그들의 구시대적 사고방식이 긁히고 긁혀 참지 못한 끝에 그들이 먼저 도발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웬만하면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리고, 해주셨다.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그 병장은 나에게 욕을 하며 화를 냈고, 나는 군대에서 막내가 할 것이라고는 상상 못할 말로 받아쳤다. 모두가 말 그대로 ‘갑분싸’ 되고, 그 병장도 당황한 끝에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나는 병사 게시판에 글을 올렸다.
결과는 우리의 완승이었다. 이젠 그 누구도 막내 병사인 우리들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머지않아 알게 되었다. 진짜 적은 병장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