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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현산 Dec 17. 2021

인간에게 다가오는 인기척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

2001년 3월4일 새벽. 서울 서부소방서 연희119안전센터 심미현 대원은 대기실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여느 날과 같은 하루였어요. 화재 진압출동과 구조출동이 계속됐지만 큰 사고는 없었고, 창천동 건물 옥상의 구조 출동을 마지막으로 평온한 시간이 흘러 갔습니다.


에에에에엥.


화재출동벨이 안전센터에 울려 퍼졌습니다. 홍제동 주택에서 화재가 발생했다는 무전이 귀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심 대원은 대기실에서 뛰쳐 나갔어요. 신속하게 방화복을 입고 안전장비들을 들고 펌프차에 올라탔습니다.


현장에서 백미터 가량 떨어진 지점. 펌프차량이 멈춰 섰습니다. 불법 추자된 차량들이 화재현장으로 가는 진입로를 막아 지나갈 틈이 보이지 않았어요. 심 대원은 동료들과 함께 차에서 뛰어내려 수관을 빼들고, 경사진 도로를 뛰어올라가며 정신없이 수관을 연결했습니다. 대원들은 20kg 넘는 안전장비를 지고 1개당 15m 남짓한 소방 호스 12개를 뛰면서 이어 붙여야 했습니다.


숨이 차올랐죠. 이마에서 땀이 쏟아져 내려 눈을 찔렀어요. 현장에 도착하니 불이 난 집 앞에서 아주머니가 먼저 도착한 소방관들을 붙잡고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건물 안에 있어요!”


최성기에 이른 불길은 2층 집을 휘감았어요. 1, 2층 창문에선 화염과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거대한 연기가 반짝이는 불씨를 품은 채 홍제동의 검은 하늘을 뒤덮었습니다. 녹번 2소대는 불길을 잡기 위해 관창을 틀어 물을 분사하며 건물 내부로 들어갔습니다. 다행히 5분여 만에 불길이 잡혔습니다. 대원들의 공기호흡기 면체를 녹여버릴 것 같던 그 맹렬한 열기도 조금씩 사그라들었습니다. 


"아들이 안에 있는데 왜 안 구해줘!"


집주인 아주머니가 다시 울부짖었습니다. 1차 인명검색 결과 주민들이 다 대피한 것을 확인했지만 구조대는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했어요. 심 대원도 잔화정리를 위해 들어갔습니다. 손 대면 바삭거리며 부서질 것 처럼 새까맣게 탄 벽돌 사이에서 분무방수로 잔화를 끄던 중, 불길이 옆집으로 번지지 않게 하라는 지시를 받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담벼락을 넘으려고 손을 짚었죠. 


쾅. 


지축이 흔들렸습니다. 검은 먼지와 블록 덩어리들이 심 대원과 동료 2명의 안전모 위로 쏟아졌습니다. 사위가 암흑으로 덮였습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죠. 집이 무너져버린 것입니다.


새벽 5시 47분, 눈이 내립니다. 심 대원은 구조되었지만, 집 주인 아들을 구하기 위해 들어간 구조대원 3명과 불을 끄던 진압대원 3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방화범인 그 아들은 진즉에 피신했죠. 7시57분, 마지막 대원이 실려 나왔습니다. 


동료를 먼저 보낸 소방관은 편히 자지 못합니다. 심 대원은 사건 이후 일곱 해가 흘렀지만 아직도 가끔 홍제동 주택이 꿈에 나타나고, 그럴 때면 식은땀을 흘리며 소스라쳐 잠에서 깨어나곤 한다고 토로합니다. 


소방관들의 수기 모음집 <기다려라, 우리가 간다>의 한 장면입니다. 이 책의 서문을 쓴 소설가 김훈은 "다가오고 있는 인기척, 그것이 인간의 희망인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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