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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경제학자의 전기에서 본 대공황 (1/3)

로버트 스키델스키의 '존 메이너드 케인스'에서

by 현상

이번 글 배경


지난 편에 말씀드린대로 이번글부터 3편에 걸쳐 로버트 스키델스키경이 쓴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전기에서 대공황 부분을 다뤄 보려고 합니다.


로버트 스키델스키경은 최초 케인스 전기를 3권에 걸쳐 집필하였는데 내용 중 중요한 부분을 모아서 'John Maynard Keynes 1883-1946: Economist, Philosopher, Statesman'이라는 한 권을 책을 냈습니다. 이 한 권의 책도 원서기준으로 본문만 약 850페이지에 이릅니다.


이를 고려대학교 고세훈 교수님이 번역을 하여 '존 메이너드 케인스: 경제학자, 철학자, 정치가'라는 제목으로 후마니타스에서 출간하였습니다. 최초 2권으로 출간되었으나 향후 1권으로 합본되었습니다. 제가 가진 책은 합본으로 2009년 9월 발간된 2판 1쇄입니다. 1,500페이지가 넘고 본문만 1,342페이지에 달합니다. 현재는 아쉽게도 절판이 되었습니다.


이 책은 케인스의 생애와 더불어, 이론, 당시의 상황이 풍부하게 담겨 있어 당시 어떠한 일들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잘알 수 있습니다. 케인스가 가진 생각 및 이론에 대해해서도 상세히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 경제학자의 전기에서 대공황 당시의 상황에 대해 잘 알 수가 있고 나아가서 추후 국제금융의 중심지가 영구의 런던에서 미국 뉴욕으로 2차 세계대전중 어떻게 이동하였는지도 상당히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이번에는 이 전기에서 대공황 당시에 관한 상황, 케인스의 생각과 처방 등에 대해 다루어 보겠습니다. 글은 제가 가진 번역본을 기준으로 작성되었으나, 일부의 경우 원문을 제가 번역하여 재작성하였습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26장 : 불황 (The Slump)


1. 1929년 여름, 어느 누구도 세계경제가 파국을 맞을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다. 월가의 주가가 고공 행진을 계속하면서, 미국인들은 그들이 영구 번영의 비밀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미국이 번영하는 한, 나머지 세계는 안도했다. 국제정치에서도 분쟁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스탈린 치하의 소련은 혁명을 수출하는데에서 자국민을 탄압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2. 1925년 로카르노 조약*은 프랑스의 두려움을 달랬고, 독일의 야망을 길들인 듯이 보였다. 히틀러는 1929년 다버논 경의 표현에 따르면 "망각 속으로 사라졌다." 무솔리니 또한 쇠락하는 듯 보였는데, 1928년 그는 리라를 과대평가함으로써 건전 재정 주창자들을 즐겁게 했다.

* 로카르노 조약 : 독일-프랑스-벨기에간 국경 인정 및 불가침, 라인란트 비무장 지대 유지,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및 폴란드와 국경문제 해결, 만약 독일이 프랑스나 벨기에를 침범할 경우 영국과 이탈리아가 피해국을 돕기로 한 것이 주요 내용입니다. 결국 어느 것도 향후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3. 물론 불온한 징후들도 있었다. 1928년 이후 미국의 저축이 주식 시장의 호황 속으로 빨려 들어가자, 제1차 생산자들은 부채 상환을 위한 자금을, 독일은 배상 지불을, 영국은 금본위 유지를 더욱 버거워했다. 이제 와서 돌아보면, 수요가 생산에서 투기로 전환되고 있음을 감지해 낼 수 있다. 그러나 소수의 우려는 낙관의 합창에 파묻히고 말았다.



4. 알다시피, 월가의 붕괴는 전무후무한 전 세계적 대불황을 촉발했다. 1930년이 도매 물가가 폭락하면서 저금리의 효과를 완전히 잠재웠고, 명목 이자율이 떨어졌는데도 실질 이자율은 급격히 올랐다.* 혹독한 불황 중에 이 일련의 일들을 겪으면서 통화정책의 효율성에 대한 케인스의 믿음은 흔들리게 된다. 그러나 1930년에 들어서고 한참이 지나서도, 사람들 대부분은 그것이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사라질 단순한 경기순환적 하강 국면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실제로 1930년 봄에는 주가와 경제활동 모두 일정한 회복세를 보이기도 했다.

* '명목이자율 = 실질이자율 + 물가상승률'입니다. 즉 명목이자율이 떨어졌는데 실질이자율이 급격이 올랐다면 물가상승률이 급격이 떨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5. 1930년 9월 케인스의 분석이 제시하는 정책적 대안들은 화폐임금을 삭감해 교역의 균형 조건들이 악화되는데 대처함으로써, 혹은 해외 대부의 압박을 줄이거나 주어진 교역조건에서 해외무역 수지를 확대함으로써 교역조건들을 개선하는 것이었다. 후자의 대안가운데 첫 번째는 국내 투자의 촉진을, 그리고 두 번째는 보호무역을 가리켰다. 세 가지 대안 모두 '실질임금'의 일정한 하락을 암시하는데, 그들 모두가 생활비에 대한 화폐임금의 상대적 감소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째와 셋째 치유책의 경우 실질임금의 감소는 수요에 대한 외생적 자극의 '부산물'로써 발생한다.



6. 그는 이렇게 썼다. '가능하다면, 화폐임금을 삭감하는 것보다 가격을 올리는 것이 낫다.'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생활비가 x퍼센트 오를 때 화폐임금을 그대로 놔두는 것이, 물가는 변하지 않은 채 화폐임금을 x퍼센트 삭감하는 것에 비해 사회적 저항이 적기 때문이다.' 둘째, '화폐임금이 x퍼센트 감소될 때, 실질임금이 그보다 적게 감소되어도 사람들은 이를 믿지 않기 때문이다.' 셋째, '가격 인상을 택하면 부담이 좀 더 광범위하게 분산되기 때문이다. 특히 그런 방식은 지대 취득 계급과 여타 고정된 화폐소득자에게 정당한 몫의 부담을 지게 만든다. 그러므로 정의와 자기 이익 어느쪽에서 보더라도 노조 지도자들은 균형을 회복하는 수단으로 화폐임금의 감소보다는 가격 인상을 선호하는 것이 옳다.' 이는 케인스가 1922년 이래 줄곧 믿어 왔던 바였다.



7. 케인스의 글에서 가장 논란이 됐던 부분은 보호무역에 대한 그의 지지였다. 그는 관세 보호가 국제수지 개선의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를 통해 ‘현존하는 상대적인 이자율 수준에서 해외로의 대출 압력’을 완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 외에도 케인스는 관세가 자본 자산의 증가, 기업 신뢰와 국내 투자 촉진, 그리고 명목 임금을 삭감하지 않고 물가 상승을 통해 실질 임금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 영국의 이자율이 상대적으로 낮으면 해외 대부가 늘 것이고, 이를 보호무역을 통한 무역 흑자분으로 메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8. 자유무역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비판은 ‘어느 제조업 국가든 대부분의 상품을 제조하는 데 있어서 다른 나라와 거의 동등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에서 비롯된다. 나아가 그는 일부 비효율을 감수하더라도 영국 농업과 같은 ‘필수 산업’을 보존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농촌 인구가 ‘버밍엄에 몰려가 나사를 만들며 살아가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처럼 관세를 지지하는 논거를 조목조목 제시한 것은, 케인스가 관세 이외에는 사실상 정부가 선택할 수 있는 정책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통화 평가절하라는 선택지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9. 정치인∙기업가∙은행가∙경제학자들이 떠드는 동안, 불황은 점차 악화되고 있었다. "전형적인 경기 침체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반작용들의 '악순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는 주식시장에서의 손실이 준 무력감이 촉발한 것이었다. ∙∙∙∙ 지난 몇 달 동안 진행된 일차상품의 가격 하락은 ∙∙∙∙ 경제사에서 가장 혹독한 불황으로 이어졌던 파동들에 비견되는 초 일급 규모의 운동이다." 이는 헨더슨*이 1930년 5월의 경제 자문 위원회 모임에서, 날로 거세지는 세계적 불황을 묘사한 말이다.

* 헨더슨 허버트 : 영국 경제학자로 케인스로부터 배웠고 대공황시절 경제자문위원회, 2차 세계대전 시절 재무부에서 케인스와 함께 활동하였습니다.



10. 경제학자들의 보고서는 1929년 9월 이래 진행된 가격의 '파국적 하락'에 주의를 환기한 후에, '최근 경제사에서 중요 상품들의 가격이 이처럼 격렬하고 급속하게 폭락했던 기록은 없다'고 선언했다. 일시적으로 회복했던 월가는 1930년 5월과 10월에 거듭해서 주저앉았다.



11. 케인스는 아직도 1930년 9월이면 가격이 회복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으나, 1930년 10월 10일에 이르면 케인스도 '월가의 최악의 파산, 브라질에서의 혁명, 독일의 임박한 붕괴, 이 모든 것은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소'라는 편지를 리디아*에게 쓰게 된다.

* 리디아 로포코바 : 케인스의 아내로 러시아 출신의 유명한 발레 무용수였습니다. 둘은 1921년 런던에서 만났고 1925년에 결혼했습니다.



12. 1930년 내내 케인스는 엄청난 에너지만 소모했을 뿐,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했다. 불황의 충격 속에서, 기대를 갖고 시작되었던 정부 조사들도 종료되었다. 케일러가 기록했듯이, 결정적인 순간은 노동당이 1930년 5월에 모슬리의 뉴딜 제안을 거부한 일이었다. 이는 “영국 국민이 자신도 모르게 오래된 방식에 의지하기로 결심한 순간”이었다. 같은 해 10월 열린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맥도널드는 대공황의 책임을 자본주의에 떠넘기며 책임을 회피했다.



13. 불황에 대한 케인스의 분석은 놀라울 정도로 낙천적이다. 그는 이번이 자본주의의 최후의 위기라는 생각과 대공황이 과거의 과잉을 바로잡기 위한 치료 과정이라는 강한 도덕적 뉘앙스를 지닌 정통 경제학의 시각 또한 거부했다. 부분적으로 이는 케인스의 타고난 낙천주의에서 비롯된 것이었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자본주의가 ‘병든’ 것이 아니라 ‘불안정할’ 뿐이라는 분석에 근거한 확신 때문이었다.



14. 케인스는 대공황에 대한 구조적 분석에도 강한 저항감을 가졌다. 왜냐하면 그런 분석은 ‘생산 구조’의 대대적이고 어쩌면 파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반면 케인스의 분석은 해결책이 밝은 심리의 회복, 그가 나중에 ‘동물적 본능(Animal Spirits)’이라 부른 것의 부활에 있다는 점을 시사했다.



14. 기업인들의 침체된 심리는 저절로 회복되지 않을 것이며, 케인스 자신도 침체가 어느 정도 바닥을 칠 것이라 믿긴 했지만 — “시간이 흐르기만 해도 어느 정도의 회복은 일어나게 마련이다”라고 말했듯 — 단순히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기업인들이 세상을 보다 자신감 있게 바라보게 만들 수 있는 어떤 변화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러한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먼저 대공황은 신이나 자연이 내린 재앙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참사로 인식되어야 했다. 그것은 관리 가능한 현상으로, 더 이상 우주적 의미를 지닌 사건이 아니라 기술적인 해결책이 가능하다는 틀 안에서 제시되어야 했다.



15. 케인스의 역설은 —많은 이들이 이해하지 못했고, 오늘날 평범한 언어로 표현된다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할— 끔찍한 사건들이 사실은 사소한 원인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해결책 또한 단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세계가 무너질 때, 우리는 뭔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믿고 싶어 하며, 단지 피할 수 있었던 정책 실수의 결과였다고 말하는 사람을 의심스럽게 바라보게 된다.



16. 1931년 6월 20일 후버 대통령은 배상을 포함해 전쟁에서 발생한 모든 정부 간 채무에 대해 1년간의 모라토리엄(즉, 면제가 아닌 지불정지) 계획을 발표했다. 세계 주식시장들에서는 일주일 동안 주가가 폭등했지만, 프랑스가 난관*에 처했다는 것이 명백해지면서 곧 잦아들었다.

* 프랑스는 후버 대통령의 모라토리엄에 매우 소극적이고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 배경에는 독일 뱅상금의 채무 유예에 대한 정치적∙도덕적 반감, 프랑스 내 정치적 갈등과 불안 및 외교적 고립, 금본위제 유지 하에서의 자본 유출 압력과 금융시장 불안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17. 미국 시카고에서 케인스는 1931년 6월 22일, 26일, 7월 2일 세 차례 강연을 하였는데 그가 그때 이야기한 대공황의 원인은 다음과 같다.



18. 그는 1925년부터 1928년까지의 호황의 주요 특징은 “아주 높은 이자율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실물 투자 목적을 위한 차입의지가 엄청났다는 점”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로 인해 "건설, 전화, 도로와 자동차 관련 기업들"에 기반을 둔 번영은 미국에서 (영국을 제외한)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인플레이션이 수행한 역할은 "놀랄 만큼 미미했다." 뒤이어 다가온 불황은 과잉투자가 낳은 불가피한 반작용 때문이 아니라 "보기 드물게 멍청한 짓"때문이었다. 기업의 상황은 이자율 하락을 요구했지만, 연방준비제도는 월가를 견제하기 위해 오히려 이자율을 올렸다. 매우 비싼 미국 화폐는 미국 외의 지역에서는 서로 모순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투기 자금이 해외 채권으로부터 월가로 몰려들었다. 일단 쇠락이 시작되자 그것은 누적적으로 힘을 더해 갔다.



19. 1931년 7월 18일 케인스 부부가 사우샘프턴으로 돌아오자 영국의 금융위기가 시작되었다.



20. 런던의 금융권이 차입은 단기로 하고 대부는 장기로 해 왔다는 점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런던의 단기 자산이 외국의 모라토리엄 - 독일은 7월 15일에 파산을 선언했다 - 에 의해 회생 불능 상태에 빠지면서, 금융권의 파산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러자 곧 정부가 파산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이 뒤따랐다. 투자자들은 영국을 돈을 소지하기에 불안한 나라로 간주했다. 한 달이 못되어 노동당 정부가 몰락했고, 곧 금본위제도 그 뒤를 따랐다.



21. 영란은행이 프랑스 중앙은행과 뉴욕 연방준비은행으로부터 일시적 자금을 얻어내자, 노동당 내각은 뉴욕 중개인 J.P. 모건으로 하여금 더 많은 차관을 주선하도록 하고, 그 조건으로 [미국이 내건] 경제 패키지를 수용하려고 했다. 뉴욕의 요구는 '세정당 모두'가 지지할 수 있는 균형예산 프로그램이었다. 새로운 내각은 8월 27일 긴축 프로그램에 전격 동의했고, 이틀 후에는 뉴욕과 파리로부터 총 8천5백만 파운드에 달하는 차관을 얻어 낼 수 있었다.



22. 케인스는 이런 식의 상황 전개가 매우 못마땅했지만, 적어도 디플레이션과 통화 재팽창(리플레이션) 문제가 마침내 합쳐지게 됐다는 사실에서 위로를 받았다. 그는 비록 개인적으로는 이제 평가절하가 바람직하다고 믿었지만, 9월 10일자 `이브닝 스탠더드`를 통해 계속해서 수입통제를 촉구했다. 이틀 후에는 `뉴 스테이츠맨`에 "절약 정책은 우리가 방금 통과해 온 것과 유사한 또 하나의 위기가 재발되는 것을 지연시킬 뿐, 방치할 수는 없다"고 기고했다.



23. 케인스가 예견했던 위기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찾아왔다. 9월 16일 발생한 인버고든의 해군 하사관 폭동은, 제국 자체가 와해되고 있음을 시사하면서 또 한 차례의 파운드 가치 급락을 가져왔다. 9월 18일에 영란은행은 주말을 고비로 환율을 잡아 두는 것이 더 이상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정부에 통보했다. 9월 21일 월요일에 필립 스노든은 윈스턴 처칠의 6년 전 결정을 뒤엎고 금 태환을 중지시켰다. 이번에는 금의 십자가[족쇄]를 영원히 벗어버린 것이다.



24. 복원되었던 국제 금본위 체계는 와해되었고, 다시는 부활하지 못했다. 금본위제는 왜 두 번째에도 실패했는가? 케인스가 1932년 4월에 쓴 논문에서 밝힌 답은, 1925년 영국이 과대평가된 환율로 금본위에 복귀한 것은 통화정책을 아예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임금을 낮출 정도로 금리를 충분히 높일 수도 없었으며, 반면에 금리를 낮췄다면 영국은 훨씬 빨리 금본위를 포기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지속적 차입이라는 중간노선이 채택됐다. 그러나 그 대가로 단기 채무가 누적됐고, 불안정한 구조는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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