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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경제학자의 전기에서 본 대공황 (3/3)

로버트 스키델스키의 '존 메이너드 케인스'에서

by 현상

29장 : 뉴딜들 (New Deals)


1.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리듬은 묘하게도 비슷하다. 이 두 10년은 모두 대재앙을 겪었고, 둘 다 중간에는 전조가 좋았으나,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두 경우 각각 전쟁과 불황에서 회복되는 듯 보였지만, 불황과 전쟁으로 도로 무너져 내렸다.



2. 이런 참사들은 19세기의 경제 상황을 지배했던 세계주의적∙비개입적 원칙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렸다. 그 원칙에 따르면,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그냥 내버려 두면 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직장을 제공하고 모두를 위해 번영을 증진시켰으며, 무엇보다도 이런 번영을 통해 전쟁의 주요 원인들을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3. 당시에는 사회적 실험들이 유행이었는데, 그것의 정치적 기원이 무엇이든, 이들 실험은 정부의 역할이 훨씬 더 확대되고 자유로운 상업의 역할은 훨씬 더 제약될 것으로 전망했다. 이런 사회적 실험들은 새로운 경제적 사고보다는 도덕∙지정학∙정치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4. 20세기의 경제 위기는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을 통과한 19세기의 사상과 마주했다. 전간 기간에 기회는 19세기에 대한 비판자들에게 주어졌는데, 이들은 종교적∙도덕적∙전략적∙사회적∙미학적∙종족적 근거에서 자유방임 자본주의를 거부했던 사람들이었다. 전쟁 자체는 전 세계에 걸친 "시장을 위한 투쟁"에서 기인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며, 그것은 정부가 공동체의 자원을 동원함으로써 무엇인가를 성취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전쟁이라는 목적을 위해 이런 일이 가능했다면, 평화를 위해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 이유는 무엇인가?



5. 19세기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자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자유방임이라는 중심적 경제 이론 - 즉, 경쟁적 교환경제는 그대로 놔두면 어떤 대안 체제보다도 더 많은 산출량을 생산하고, 생산된 것을 더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론 - 에 대해 효과적으로 도전하지 못했다. 비판자들은 이런 주장의 내적 논리에 맞설 지적 도구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 그들은 시장 체제가 전통∙도덕∙사회적 건강 혹은 국가 안전과 상충하는 것이라고, 외부로부터 공격했다.



6. 케인스는 자본주의 체제의 치명적인 결함이 소득에 대한 소비의 가변성에 있으며, 이는 다시 화폐의 사용과 목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 결과, 시장 체제는 장기 불황에 쉽사리 빠져 들었다. 만일 정책을 통해 공동체가 그들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을 소비하도록 유인한다면 기존 체제는 구원될 수 있다. 그리하여 케인스는 그의 경제학에서 급진주의자였고, 그가 내건 사회적 목표에서 "온건한 보수주의자"였다.



7. 1933년 3월 4일 허버트 후버가 백악관을 물러나면서 미국 권부의 무기력증도 끝이 났다. 그를 계승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불황을 전쟁에 비유하면서 불황을 격퇴하기 위한 비상 전시권을 요구했고, 돈놀이하는 자들을 '회당에서 쫓아낸다'라고 공언했다. 그의 취임 연설은 전 세계에 희망과 파장을 일으켰다.



8. 루스벨트는 '백일 회의'로 화답했는데, "미국 역사에서 결코 볼 수 없었던 생각과 정책 구상들이 대통령의 주도로 잇달아"쏟아져 나왔다. 뉴딜에 속도가 붙자, 열정적인 젊은 법률가∙대학교수∙경제학자∙사회학자들이 워싱턴으로 몰려들었다.



9. 의회는 미국 정치 전통의 상이한 요소들에서 따온 온갖 경기회복 조치들을 뒤섞어 법제화했는데, 그것들은 어떤 일관된 구상에 의한 것도 아니었고, 물론 케인스에서 기원한 것도 아니었으며, 단지 공멸을 막고 산업을 다시 굴러가게 하기 위해 "무언가 취해져야 한다"는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숨가쁜 행동주의는 신뢰의 급상승으로 곧바로 이어졌다. 월가의 주가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3월과 7월 사이 산업 생산은 거의 두 배로 뛰었다. 다시 주도권은 상황이 아닌, 정부의 손으로 넘어갔다.



10. 케인스는 루스벨트의 실험들을 진정 어린 감탄과 당혹감 속에서 지켜보았다. 특히 불가사의한 것은 기업 활동이 거의 즉각 회복되었다는 점인데, 아직 대통령의 프로그램에 들어 있는 팽창적 조치들이 효과를 나타내기 훨씬 전이었기 때문이다. 케인스는 루스벨트가 "실질적 요인보다는 심리적 요인에 너무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했다.



11. 1934년 5월 28일 월요일, 케인스는 마침내 루스벨트를 만났다. 한 시간 동안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케인스는 그 독대가 "매혹적이었고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라고 생각했고, 루스벨트는 "케인스와 멋진 대화를 나눴고 그를 엄청 좋아하게 됐다네"라고 말했다.



12. 6월 6일 미국 정치경제클럽에서의 연설에서 케인스는 경제학자들을 대상으로 자신의 '유효수요론'의 대강을 설명했다. 그가 워싱턴의 관리들과 가졌던 토론들도 그 이론에 토대를 두었었다. 따라서 미국은 영국보다 앞서서 케인스 경제학을 받아들인 셈인데, 이는 희망을 걸 만한 것이 영국보다 미국에 더 많았기 때문이다.



13. "어떤 주어진 상황에서, 기업가들이 증가된 유효수요를 예측하고 그것에 대비하지 않는다면, 산출과 고용은 늘어날 수 없다"고 케인스는 말했다. 미국적 조건을 볼 때 그런 예측은 정부의 차입 지출 규모에 달려 있었다. 그는 증가된 지출의 일부는 생산을 늘이는 데 쓰일 것이고, 또 다른 일부는 물가 상승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회복이 진행되고 병목 현상이 나타날수록 물가에 미치는 영향은 커질 것이라고 했다.*

* 경기가 점점 좋아지면(회복이 진행되면), 기업들은 더 많은 상품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런데 생산을 늘리는 과정에서 원자재나 인력, 기계 같은 생산 요소가 부족해지는 상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병목 현상’이라고 부릅니다. 이런 병목 현상이 생기면, 상품이나 서비스의 공급은 더 이상 쉽게 늘어나지 않는데, 사람들의 수요(유효수요)는 계속 증가합니다. 그 결과, 공급보다 수요가 많아져서 물가가 오르게 됩니다. 즉, 회복이 진행될수록 물가가 더 빠르게 오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14. 케인스는 "진정한" 인플레이션은 완전고용에 도달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공동체의 노동과 자본 설비가 모두 고용되는 시점에 도달하면, 유효수요를 더 증가시키는 일은, 가격을 끝없이 올리는 것 외에, 아무런 효과도 가져오지 않는다." 그 지점에서 건전재정의 원칙들이 다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15. 1934년 봄이 되자 고용에 관한 케인스의 새 이론이 최종적인 모습을 드러냈고 그해 가을 케인스는 '고영,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으로 제목이 바뀐 자기 책의 교정쇄를 들고 강의를 했다.



16. 케인스의 '일반이론'은 두 가지 생각을 묶은 것이다. 첫째, 투자 유인은 통상 너무 약하고, 퇴장의 성향은 너무 강하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황에서 자원의 완전고용은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둘째, 투자수요에 가해지는 모든 '충격'을 경제가 견딜 수 있도록 조절하는 것은 임금이나 이자율의 변화가 아니라 산출과 고용의 변화라는 점이다 [시장은 가격이 아닌 양에 따라 조정된다는 것이다.] 이 두 명제가 합해질 때, 자본주의경제는 통상 '완전'에 한참 못 미치는 산출과 고용수준 주위를 오간다는 암시를 얻게 된다. 두 번째 명제가 케인스 '단기' 이론의 요체이다.



17. '일반이론'은 출판되자 경제학자들의 공방전이 뒤따랐다. 그것은 즉각 불온한 책으로 인식되었다. 전 세계의 일반 언론뿐 아니라 주요 저널들도 세세한 서평을 실었다. 반응은 첨예하게 나뉘었지만 아예 내치는 경우는 없었다. 가장 적대적인 비평가조차 케인스에게 진지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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