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춰야만 비로소 안전해지는 시간들
회색 아스팔트 위, 굵은 흰색 페인트가 칠해진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선다.
신호등은 단호한 붉은 눈을 뜨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길 건너편까지는 불과 십여 미터. 평소라면 열 걸음이면 닿을 거리지만, 지금은 건널 수 없는 강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바쁜데, 약속 시간에 늦었는데, 좌우를 둘러봐도 지나가는 차 한 대 없는데. 마음속 조급함이 발끝을 톡톡, 아스팔트 바닥을 두드리게 만든다.
하지만 빨간 불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나의 사정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듯, 무심하고도 견고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변을 둘러본다. 나만 멈춘 것이 아니다.
출근 가방을 멘 직장인, 무거운 장바구니를 든 아주머니, 이어폰을 꽂은 학생까지. 모두가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듯 같은 선상에 멈춰 있다. 누군가는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켜고, 누군가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미간을 찌푸린다. 모두가 어딘가로 가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지만, 그 누구도 감히 선을 넘지 못한다. 불가항력의 멈춤.
이 짧은 정지(停止)의 순간이 때로는 형벌처럼 느껴진다. 온몸의 근육은 앞으로 뛰쳐나갈 준비가 되어 있는데, 시스템이 나를 강제로 붙잡아 두는 듯한 그 답답함. 도시의 소음 속에서 우리는 침묵하며 신호가 바뀌기만을 기다린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멈춤을 싫어한다. 아니, 두려워한다.
현대 사회에서 '멈춤'은 곧 비효율이자 도태와 동의어처럼 쓰인다. 끊임없이 움직여야 하고, 남보다 빨리 도착해야 하며, 1분 1초도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공기처럼 우리를 감싸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신호등을 원망한다.
'왜 하필 지금이야?'
'조금만 더 빨리 걸었으면 지날 수 있었는데.'
머릿속은 온통 가정법과 후회로 가득 찬다. 빨간 불은 내 인생의 흐름을 끊어먹는 방해꾼처럼 보인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신호등은 그저 자신의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정해진 알고리즘에 따라, 약속된 시간만큼 정확히 붉은 빛을 뿜어내고 있는 기계일 뿐이다. 그것은 우리의 조급함에 반응하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급한 표정을 지어도, 발을 동동 구르며 애원해도, 빨간 불은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다 채운 뒤에야 물러난다.
그 무심한 공정함 앞에서 문득 깨닫는다.
내가 싸우고 있는 대상은 저 신호등이 아니라, 내 안의 '속도 강박'일지도 모른다.
신호등이 없던 시절을 상상해본다. 아니, 신호등이 고장 난 교차로를 떠올려보자.
그곳은 아비규환이다. 차들은 서로 먼저 머리를 들이밀고, 보행자는 눈치를 보며 목숨을 걸고 길을 건너야 한다. 힘센 자가 먼저 가고, 목소리 큰 자가 우선권을 가진다. 질서는 사라지고 혼란과 위험만이 남는다.
신호등은 그 야생의 혼란을 정리한 문명의 지혜다.
빨간 불은 권위적이지만 공평하다. 고급 세단을 탄 사람도, 낡은 자전거를 탄 사람도, 급한 약속이 있는 사장님도, 하교하는 초등학생도 빨간 불 앞에서는 평등하게 멈춰야 한다. 예외는 없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 '강제된 멈춤'이 우리를 보호한다.
빨간 불이 나를 막아서는 동안, 교차로의 다른 쪽에서는 거대한 트럭과 버스들이 굉음을 내며 질주한다. 만약 내가 조급함을 이기지 못하고 뛰어들었다면, 나는 그 흐름에 휩쓸려 부서졌을 것이다. 빨간 불은 나를 괴롭히기 위해 켜진 것이 아니라, "지금 건너면 위험해. 잠시 숨을 고르고 있어."라고 말하며 단단한 팔로 나를 막아서는 보호자였던 것이다.
우리네 인생에도 그런 빨간 불이 켜지는 순간이 온다.
죽어라 노력했는데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 승진에서 누락되었을 때, 믿었던 관계가 끊어졌을 때. 우리는 마치 빨간 불에 갇힌 것처럼 좌절한다. 남들은 초록 불을 받아 씽씽 달리는 것 같은데, 나만 이 자리에 멈춰 서 있는 것 같은 박탈감.
하지만 그 시간은 버려지는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과열된 엔진을 식히는 시간이고, 주변을 둘러볼 시야를 확보하는 시간이며, 다가올 초록 불을 위해 운동화 끈을 고쳐 매는 시간이다. 신호등이 교차로의 사고를 막아주듯, 인생의 정체기는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달리다 부서지는 것을 막아주는 안전장치일지도 모른다.
나는 찌푸렸던 미간을 펴고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신호를 기다리지 않고 바쁘게 걸었다면 보지 못했을 파란 하늘이 빌딩 숲 사이에 걸려 있다. 폐부 깊숙이 숨을 들이마신다. 매연 섞인 도시의 공기지만, 멈춰 서서 마시니 제법 시원하다.
'멈춤'은 문장 속의 쉼표와 같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문장은 읽는 이를 숨 막히게 한다. 쉼표가 있어야 문장의 의미가 선명해지고, 다음 문장이 힘을 얻는다. 빨간 불은 내 하루에 찍힌 쉼표다. 원하지 않았어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어도, 이 쉼표 덕분에 나는 잠시 세상의 속도에서 이탈해 숨을 고른다.
'띠링— 띠리링—'
경쾌한 전자음과 함께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뀐다.
멈춰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한 발을 내딛는다. 나도 그 흐름에 맞춰 횡단보도로 들어선다. 좌우를 살핀다. 모든 차가 얌전히 멈춰 있다. 나는 안전하다. 이 길은 이제 나의 것이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생각한다.
이 안전한 보행은 지난 1분간의 기다림이 준 선물이다. 내가 멈춰 있었기에, 차들이 멈출 시간을 벌었고, 덕분에 나는 아무런 위험 없이 이 길을 건넌다.
인생의 신호등도 그렇다.
지금 당신의 눈앞에 빨간 불이 켜져 있다 해도 불안해하지 말기를.
영원히 켜져 있는 빨간 불은 없다. 고장 나지 않는 한, 신호등은 반드시 바뀐다. 그것은 시스템의 약속이고, 시간의 법칙이다.
당신의 멈춤도 영원하지 않다.
지금은 잠시 멈춰 서서 하늘을 보고, 숨을 고르고, 나를 정비하면 된다.
조급해하지 않아도 초록 불은 온다.
기다림 끝에 켜지는 초록 불은 더 선명하고,
준비된 자가 건너는 길은 더 안전하다.
이제 곧, 당신의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