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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수 Jan 14. 2023

업계를 떠나며

[일상잡설]

무신사를 떠난다.

23년간 몸담았던 온라인과 이커머스 업계도 떠난다.


작게 보면 내겐 적지 않은 돈의 스톡옵션을,

크게 보면 나름 20년 넘게 갈고 닦은 숙련도를 모두 뒤로 하고 나선다.


지난 세월 해왔던 일을

남은 세월에도 계속 하며 산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는 것이 좋겠는가?

그러는 것은 가능한가?


남은 수십년 동안에도 그간 해왔던 일로써 여전히 새롭고 설렐 수 있는가? 6이나 7로 시작하는 나이여도 내가 몸담았던 필드에 섞여 영향력 있게 일할 수 있을까? 애플 WWDC 열 번 더 보면 환갑인데.


이 업계를 떠날 때가 임박했다는 현실을 몸으로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다른 문을 두드린다면, 그 문 뒤에서는 길이 아니라 벽을 만나지 않을까?


어차피 새로운 문을 열어 새 길을 나서야 한다면, 그때 가서 주섬주섬 짐 꾸리고 채비할게 아니라 지금 나서야 하지 않을까?


삶을 반 접은 시점에 이르자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겁도 났다.


다시 돌아오게 되면 어쩌지? 다시 돌아올 수는 있는 나이인가? 컴백한다고 내 자리가 남아있을까?


주변 사람들이 점점 죽고 늙고 자라다 보니 새삼 사무치게 느끼는 사실이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고, 끝이 없는 것도 없으며,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지난 20년을 굴려온 일로써 남은 30년도 굴릴 순 없어 보였다. 내가 버틴다 해도 시장은 버티는 나를 버텨주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사업체를 꾸리지 못한 나는, 업계와 시장에서 내뱉어지는 낡은 나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2022년은 이런 생각들이 맴맴 돌며 고민했던 한 해였다.


-


이윽고 새로운 문을 찾았다.

이는 기존에 내가 해왔던 일과 대척점인 분야다. 온라인이 아니라 오프라인, 짧은 호흡보다 긴 호흡, 순발력보다 지구력, 화면 너머의 세계가 아니라 직접 몸으로 겪는 세계, 손바닥 위가 승부처인 모바일이 아니라 사람들이 머무는 물리적 공간에 관한 일이다.


익숙하고 능숙한 일을 해오며 언젠가부터 잠들 무렵 허탈한 마음에 젖어들던 날들이 이어졌다. 내게는 낯설고 버겁지만 설레는 긴장과 겸손한 마음으로 맞는 날들이 필요했나 보다.


그동안 머물던 방을 뒤로 하고 새로운 문으로 들어갔을 때 그 문 안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남은 세월 할 일로써 설레는 긴장으로 살 수 있다면 내겐 감사하다.


새롭고 낯선 분야에 뛰어드니 처음부터 다시 밟아가야 하는 낮아진 나를 회복하게 되어 좋다. 낮아졌다는 것이 젊어졌다는 것이 아님에도 행복한 착시로 충분하다. 행운이다.


고뇌는 필연이지만 운은 우연이다.

필연적이고 필사적인 고민은 우연히라도 운을 만나기도 하나 보다.




http://m.thebell.co.kr/m/newsview.asp?svccode=00&newskey=202301172116409760108039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215/0001068685


https://seoulpi.co.kr/98252/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11/0003007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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