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호아퀸 피닉스 (Joaquin Phoenix) 주연의 영화 <조커>를 보았다.
한 사람의 상처와 좌절과 극복에 관한 영화였고, 그를 위로할 수 밖에 없게 하는 영화였다.
주인공 아서가 버겁게 지켜내는 '선량한 시민'으로서의 입지와 그를 끊임없이 벼락 아래로 등 떠미는 사람들의 차가운 무신경이 참기 어려운 좌절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본인의 우발적인 살인이 상상치도 못 한 사회적 반향을 불러오고 사람들로부터 영웅으로 찬양받기에 이르렀을 때, 그가 느꼈을 심정이란.
광대 분장을 한 선량한 시민에게는 시비와 폭력이, 살인을 한 자에게는 권위와 찬양과 복종이 뒤따르리라.
#2.
뉴저지에 첫 눈이 내렸다. 작년에도 그랬는데, 올해의 첫눈도 역시 5-6 인치가 쌓이는 폭설이었다.
이 눈 덕택에 회사는 조기 퇴근을 결정했다. 평소와는 다른 퇴근 시간과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고) 평소와는 다른 퇴근 풍경에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한) 기분이 조금 들떴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평소와는 다른 기분으로 거리를 걷고 있는 듯 했다.
Anomaly. 조금이라도 평소와 다른 상황에 처해졌을 때 사람들의 일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설사 그 변화가 '날씨' 같은 일상적인 변수 때문이라 할지라도. 일상의 직진 도로에서 벗어나, 색다른 풍경의 비포장 도로를 운전하는 기분이었다. 즐거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집에 도착했을 때 거실은 아직 환했다. 거실 창 밖으로 이웃집 아저씨와 터커(아저씨네 개 - 덩치가 크고 털이 새까맣다)가 보였다. 겨울에는 후다닥 산책만 하고 집에 들어가던 둘도, 오늘은 눈 내리는 마당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나는 눈밭에 파뭍혀 놀고, 다른 하나는 마당의 눈을 치우면서. 너무 귀여운 풍경이었다. 이 모든 변화를 가져온 폭설에 짜릿함을 느꼈다.
어쩌면 조커가 첫 번째 살인 후 느꼈던 감정이 이런 종류는 아니었을까? 이 Anomaly가 모두 나의 창조물이라고 생각하면, 상상할 수도 없이 어마어마한 희열을 느끼게 될 것 같다.
#3.
함박눈을 맞으며 우체국에 소포를 픽업하러 갔다. 원래 주중에는 회사 때문에 우체국 영업시간에 맞춰 갈 수 없으니 주말에 가려고 했는데, 갑자기 내린 눈 덕분에 월요일 오후에 다녀올 수 있게 되어 기뻤다. 특히나 그 소포가 이혬이 보낸 (뒤늦은) 청첩장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더 그랬다. 온라인으로 조회했을 때 소포 종류에 'International' 이라는 문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메신저나 이메일이 아닌 손글씨로 받는 친구의 문장이 얼마만인가.
집에서 우체국까지 도보로 10분이면 가는 거리인데, 눈 때문에 미끄러질까봐 살살 걷느라 20분 정도 걸렸다. 사실은 걸음걸이 때문이었다기 보다도, 가는 길에 공원 언덕에서 눈썰매 타는 어린이들 구경하고, 눈밭에서 뛰어노는 청소년들 구경하고, 소나무와 관목에 쌓인 눈 사진을 찍느라 그랬다. 고요하게 들썩이는 바깥 풍경과는 달리 우체국 직원 아저씨는 조금 심드렁했다.
상자는 생각보다 크고 무거웠다. 부피에 비해서도 무거웠다. 상자를 한 쪽 옆구리에서 다른 쪽으로 바꿔 들 때 마다, 무언가 묵직한 것이 상자 벽에 부딪혔다.
- 액체류를 보낸건가?
상자를 열었을 때, 가장 먼저 이혬의 청첩 카드가, 그리고 그 아래에는 네 권의 책이 보였다. 그 중에는 김애란의 소설집도, 인터넷에서 많이 봤던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에세이도 있었다.
- 아... 안 그래도 한국어 종이책이 그리웠는데.
내 결혼식 때 림이가 선물로 줬던 책들이 생각났다. 주기만 하는 친구들이 고마웠다.
오랜만에 보아도, 친구의 글씨체는 여전했고 익숙했다. 특유의 글씨체에서 반가운 이혬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버거운 순간도 있었어' 라는 문장이 속에 콕 박혀 잠깐 울었다. 아, 그런 순간이 나한테도 있었는데. 그 순간을 이겨내기 위해 의지했던 몇 명의 친구들이 떠올랐고, 이혬에게 내가 그런 친구 역할을 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미안하고 마음 아팠다. 어쨌거나 결혼식까지 잘 마치긴 했지만, 그녀 인생의 소중한 고민과 감정의 시간들을 공유받지 못한 것에 대한 이기적인 아쉬움이 남았다.
감정을 추스르고 이혬이 보내준 책들을 살펴보는데, 세 번째 책에 또 다른 카드가 들어있는게 아닌가! 이번엔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의둉의 편지였다. 손수 그린 그림과 함께. 서프라이즈의 기쁨과 편지의 내용에 감동은 배가되었다. '얘네 뭐야... 나한테 왜 이래...'를 반복하며 오랜만에 즐거움의 눈물을 쏟았다. 손으로 쓴 편지와 본인이 읽은 책을 선물해주는 친구들이 있는 나는 정말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각성했다. 멀리 있지만 가까운 사람들에게, 자주는 아니더라도 잊지 않고 애정과 감사를 표현하며 사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내가 받아보니 그 무엇보다도 값진 선물이었다.
어쨌든 이혬이라면 어디서든 단단하게 뿌리 내리고 잘 살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들 중 은행 금리와 저축상품 정보와 부동산 시세에 가장 빠삭한 사람이니까. 신혼부부 보조금 정책 같은 것들을 200% 활용해낼, 살뜰하고 부지런한 사람이니까. 내가 알지 못 하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내 울타리 안으로 넘어오고, 내 울타리와 본인의 울타리를 연결시켜 버려, 이내 부지불식 간에 내 마음의 공간을 넓혀주는 사람이니까.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였나. 휴학 문제를 두고 아빠와 싸운 뒤, 무작정 김해 집을 나와 대구에 있는 이혬의 학교 기숙사에서 하룻밤을 보냈던 적이 있다. 다행히 그녀의 룸메들은 방학 기간 동안 모두 집에 가고 없었다. 그 때 이혬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내 잠옷과 잠자리를 챙겨주었다. 처음 가 본 공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치 그 곳에서 일 년은 살았던 사람같은 기분이 되었다. 반강제적으로 주어진 기분이었으나, 나는 그 새로운 익숙함이 싫지 않았다.
편지에서 이혬은 벌써부터 '아기 가지는' 일에 대해 설레발을 치고 있었다. ‘아기 가지는' 일에 대한 그녀의 설레발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가령, ‘결혼은 네가 먼저 하지만, 아기는 비슷한 시기에 낳아서 같이 키우자' 같은. 내 친구들 중에 이렇게 반복적으로 임신의 압박을 주는 사람은 얘 밖에 없을 것이다. 편지를 쓴 시점은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이었을텐데. 너무 이혬스러워서 웃음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