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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유 May 13. 2019

와이프의 덕질을 어디까지 이해할 것인가?

어찌 보면 '최애의 닮은꼴'과 결혼한 '성공한 덕후'인 셈이지만...

2010년의 이야기다.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이 건국 최초로 해외 개최 월드컵에서 16강에 진출하고, 동시에 인류의 해악 부부젤라가 전 세계 축구장에 특히 상암월드컵경기장에 보급되는 참극이 빚어진 원년. 그 해 5월 발행된 월드컵특집호 ‘베스트일레븐’에는 월드컵에서 주목해야 할 각국 선수 중 하나로 혼다 케이스케가 실려 있었는데, 난 그 얼굴을 본 순간 반했다. 그 얼굴은 18년 인생에서 쌓아온 빅데이터를 총집합해 만든 이상형의 결정체였던 것이다.

최고다, 혼다 선수!!!


안타깝게도 그 덕통사고 이후 10여년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그를 실제로 만나지 못했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진짜 혼다 선수를 만나볼 기회는 단 한 번도 없었으나 어쩌다 그와 외모·키·몸무게·나이 등 모든 것이 비슷한 남자를 만나게는 됐다. 그리고 거기에 넘어가 결혼까지 골인. 어찌 보면 ‘최애의 닮은꼴과 결혼한 성공한 덕후’인 셈이었으나, 나는 아직 목말랐다. 남편은 남편이고 최애는 최애니까! 그 둘은 분명히 달랐다.


그리고 얼마 전, 10여년 만에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혼다 선수가 10년 만에 한국을 찾는다는 거였다. 2019 AFC 아시아챔피언스리그에서 혼다의 팀 멜버른과 K리그클래식 대구FC가 한 조에 묶여 1차전은 멜버른에서, 2차전은 대구에서 치르게 된 것이다.


3월의 어느 날 근무시간, 멜버른에서 진행된 1차전을 일하는 척하며 화면을 작게 해놓고 몰래 보던 나는 -이 글을 데스킹 해주시는 편집장님, 죄송합니다- 2차전을 대구에서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른 AFC 홈페이지에 접속해 2차전 날짜를 확인한 뒤 곧바로 휴가를 냈다. 5월 8일.

그 소식을 들은 남편의 반응은 생각보다 쿨했다. “당일치기로 가는 거야? 어차피 난 회사 못 빼니까 잘 다녀와.” 너무 쿨해서 살짝 당황할 정도였다. 나는 만약 반대의 입장으로, 남편이 10년 동안 좋아한, 나를 빼닮은 외국의 여자 스포츠 선수를 보러 평일에 회사를 빼고 가겠다고 하면 이해는 해도 조금 서운할 것 같은데 말이다. 게다가 평일에 대구까지 간다고? ”그럴 거면 그냥 나를 봐!” 할 것 같은데. 그러나 남편은 의연했다.        


그런데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곧 부부젤라 보급만큼 끔찍한 비극이 날 덮쳤다.


경기를 이틀 앞둔 6일, 멜버른 측은 공식 인스타그램을 통해 대구를 방문한 선수단의 모습을 공개했다. 그런데... 혼다 선수는 거기 없었다.


같은 시간, 혼다 선수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Melbourne” “#OOTD” “#Fashion” 따위 해시태그를 달고 자신의 멋진 패션 센스를 과시하는 사진이나 올렸다. 이 와중에도 멋있을 셈이냐고 중얼거리며 사진을 확대해서 보는 순간 무언가 우두두둑 하고 거세게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모냐면 그건 바로 내 억장ㅎ

억장이 무너진 나는 눈물을 머금고 예매한 경기 입장권(무려 1열 한가운데 좌석이었는데...)과 대구 왕복 KTX 티켓을 환불했다. 이렇게 또 어긋나다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


반대로, 남편에게는 이게 인생의 진리처럼 느껴진 듯했다. 쿨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 굴던 남편은 갑자기 엄청 하이텐션이 되더니 이렇게 못 생긴 이모티콘을 보내며 나를 농락했다.

그래… 나는 2D 팬이랑 다를 바 없었다.


경기 당일, 10년의 기대가 무너진 나는 우울감에 젖어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 있다가 5시가 돼서야 일어났다. 그리고 퇴근한 남편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대구-멜버른 경기를 테레비 중계를 통해 봤다. 싱글벙글대며 평소보다 맛있게 밥을 두 공기나 먹어치운 남편은 “원정 관중이 없네. 저기 갔었으면 카메라 잡혔겠다”느니 “저기 있었으면 오늘 이렇게 같이 밥도 못 먹었겠어. 완전 맛있는데”하고 즐거워했다.

이날 대구는 멜버른에 4-0 대승을 거뒀고, 그 모습을 보던 남편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만약 혼다 왔었어도 팬들한테 인사하고 이럴 분위기는 아니었겠어”하고 위로인지 놀림인지 뭔지 모를 말로 깐족 거렸다.


그 모습을 보며 문득 만약 진짜 혼다 선수가 한국에 와서, 내가 대구 구장을 방문했었더라면 남편이 처음의 담담함을 유지했을지 궁금해졌다. 잠들기 전 남편이 “만약 오늘 대구 갔었더라면 지금쯤 서울 도착했겠네. 피곤했을 게 분명해. 안 가길 잘했지”라고 장황하게 말함으로써 그 의문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나름 쿨한 척 했으나 아내의 덕질을 우려(?)했던 것 같던 그 모습이 또 귀엽기도 해서, 나도 이제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여태껏 혼다 선수를 직접 보지 못한 건 운명의 장난이 아니라 순리였다고 말이다. 그래도 여전히 못 본 건 아쉽긴 해


* 이 글은 허프포스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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