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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현유 Mar 15. 2020

니캅 벗은 사우디 아라비아 새댁과 셀카 찍은 썰

왜 나는 사우디 여성들에 대해 그렇게 편협하게 생각했을까?

말레이시아 여행을 다녀왔다. 최북단의 조그만 섬 랑카위와 수도 쿠알라룸푸르를 3박씩 방문하는 일정. 패키지였던 신혼여행보다 여러 모로 재미있었고, 신혼여행에서는 못 할 특별한 경험도 했다. 바로 외모와 복장 자체로 '소수자'가 된 것. 우리를 제외하고, 랑카위는 대부분의 관광객이 무슬림 또는 유럽인이라 동아시아 외모를 한 채 자유분방한 옷을 입고 거리를 다니는 건 우리 부부 뿐이었다.


지나갈 때마다 남녀를 불문한 현지인들이 우리를 쳐다보고 신기해 했으며, 한 글자로 된 성을 들려주면 따라하며 재미있어 했고,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에 대해 물었다. 여행을 많이 다녀본 건 아니었지만 전 세계 어딜 가도 한국인 없는 곳이 드문 요 근래, 게다가 동남아에서, 정말 특이한 경험이기는 했다.


랑카위에서의 둘째 날에는 크루즈를 탔다. 당연히 한국인은 우리뿐이었고 동북아시아 인 역시 우리뿐이었다. 우리를 제외하면 전부 인도 또는 중동 출신들. 스태프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크루즈를 함께 탄 사람 중에는 눈을 제외한 온몸을 검은 천 옷(차도르)으로 칭칭 휘감은 중동 아가씨가 있었다. 말레이시아에 도착하자마자 여기저기서 볼 수 있는 여성 복장 중 하나였기에 크게 신경쓰지는 않았다. 다만 그 아가씨가 선글라스를 꺼내 쓰는 걸 보고, 저렇게 눈코입을 다 안 보이게 해서야 같이 온 남자는 자기 여자를 알아보기나 할까 싶은 생각이 들긴 했다.


나름 내 생각만큼 엄격하지는 않은 모양인지, 배를 탄 뒤 햇볕이 강해지자 그녀는 입을 가리고 있던 니캅을 풀어버리는 한편 팔을 걷어 보이기도 했다. 절대 맨얼굴과 맨살을 외간남자에게 보여줄 수 없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와 함께 온 중동 남자는 그녀를 어찌나 보석같이 애지중지하던지, 그녀가 화장실에라도 가려 하면 화장실 앞에서 안달복달 기다리고 스태프가 마실 것이 필요하냐고 묻자 그녀를 대신해 모든 대답을 해 주었다.


예상 외였다. 저렇게 여성들이 온 몸을 둘둘 가리고 다니는 나라는 여성 인권이 낮아 굉장히 천대받는 줄 알았는데, 그 남자의 행동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다만 내가 가진 물건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을 대하는 자세였기 때문에 그닥 한 사람의 인격체로 대한다는 느낌이 들진 않았다. 차도르로 온 몸을 가린 그녀의 존재 자체와 그녀와 함께 온 그 남자의 태도로 인해 그녀는 딱히 사람 같이 느껴지지가 않았다. 신기한 인형 같은 느낌.


크루즈는 술이 공짜였다. 크루즈 스탭들은 나와 남편에게 "킴, 황, 한국인들은 정말 술을 잘 먹는다던데!"라며 술을 계속 권했고 우리가 흥겨워하자 이런 노래를 어디서 찾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올드한 한국 노래들을 틀어주며 흥을 돋궜다. 베이비복스... 뭐 이런? 그 가운데 남편은 다른 맥주를 구하러 자리를 떴고, 나 역시 술 좀 깰 겸 갑판에 올랐다.


갑판에는 아까의 그녀가 혼자 서 있었다. 그 중동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올라오자 그녀는 갑자기 엄청 반가운 표정을 지으면서 자신의 아이폰을 내밀었다. 포토 포토! 찍어 달라는 건가? 잠깐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녀는 내 옆에 와서 팔짱을 끼고 셀카를 찍었다. 오호, 그렇다면 나도. 나도 내 껄로 찍겠다고 했더니 그녀는 기꺼이 내 셀카에 응해주었다.

나와 그녀.

굿굿. 유 쏘 뷰티풀~~ 웨얼 알 유 프롬?


밑빠진 독처럼 계속 제공되는 바카디 칵테일에 흥이, 연달아 재생되는 베이비복스와 신화의 노래에 국뽕이 올라 있던 내가 먼저 물었다. 사우디 아라비아라고 했다. 그녀는 나에게 국적을 따로 묻지 않았다. 아까 스태프들이 큰 소리로 "K팝의 나라 한국에서 온 킴과 황~~"이라고 우리를 소개하며 BTS 노래를 켰기 때문일지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한 번 뭔가 국뽕과 수치심이 섞여(?) 얼굴이 붉어진다.


어쨌든 그녀와 대화한 게 신이 난 나는 그녀에게 또 물었다. 전 여기 처음 와 봤는데, 정말 좋은 곳인 것 같아요. 말레이시아 전에 와 본 적 있어요? 그녀는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니문." 그녀의 대답이었다. 오~~ 콩그레츄레이션. 언제까지 허니문이예요? 그녀는 그냥 웃으며 나에게 팔짱을 또 꼈다. 영어를 잘 못 하는 듯 했는데 그때 그녀의 남편이 등장했다.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던 에어팟 한 짝을 소파 밑에서 발견한 듯한 표정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그 남자를 보고 나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크루즈를 마치고 배를 떠나기 전, 나는 그녀를 향해 다가가서 만나서 정말 반가웠고 행복한 신혼여행 보내라고 그랬다. 그랬더니 그녀는 갑자기 나를 와락 안으면서 땡큐땡큐. 땡큐쏘머치~ 나이스츄미츄투~ 하고 말했고, 끝으로 나와 그녀는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짧은 경험이었지만 뭐랄까, 신기했다. 그녀는 인형이 아니고 살아있는 사람이었고, 그녀에게도 분명 일상적인 삶이 존재할 것이었다. 그 더위 속에서 온 몸을 검은 천으로 둘둘 감은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하며 어깨를 다 드러내놓고 갑판 위를 뛰어다니면서 춤추는 동양여자를 지켜봤을까?


남성 보호자가 없는 여성은 혼자 여행을 갈 수 없는 사우디 아라비아 현행법상, 나는 그녀가 인생에서 처음 본 동아시아인이었을 것이다.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모르지만 같이 팔짱을 끼고 사진을 찍자고 한 건 신기해서였을까? 나와 어떤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까?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대충은 알아야 그런 걸 예상할 수 있을 텐데, 사우디 아라비아 여자의 삶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라곤 별로 없었다. 외출할 때 몸을 가려야 한다, 더워 죽겠지만 시꺼먼 천으로 몸을 두르고 다녀야 한다, 남편이 아내를 4명 둘 수 있다, 여성 인권이 최악 중에서도 최악, 2018년에야 여성이 운전면허를 딸 수 있게 됨, 등등. 안타까운 여성들! 이라고만 생각했지 그곳 출신의 여성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고,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을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 후,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사우디 아라비아 여성들의 삶에 대해 이것저것 찾아봤다. 그러다가 보게 된 영화. 와즈다.


'와즈다'는 사우디 아라비아 최초의 상업영화이자 최초의 여성감독이 제작한 영화다. 모든 장면을 유일하게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촬영한 영화이기도 하다(사우디 아라비아에서는 영화를 불경하게 여긴다고 한다). 제작 과정에서도 어려움이 컸다고 한다. 감독이 몇 차례의 살해협박을 받았다고. 또 여성과 남성이 함께 일하고 있는 것을 사회 풍토상 안좋게 여기기 때문에 촬영 내내 감독은 차 안에서 지시를 내리고, 촬영된 컷을 차 안에서 확인하고, 다시 찍느라고 일반적인 영화보다 촬영 시간이 더 소요됐다고 한다.

와즈다와 압둘라놈.

영화 주인공은 10세 소녀 '와즈다'다. 와즈다는 매일 자신을 놀리는 옆집 남자사람친구 압둘라 새끼 때문에 빡쳐서 자전거를 타고 싶어 한다. 하지만 모두들 "여자는 자전거를 타면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된다"며 자전거를 못 타게 하고, 와즈다는 직접 자전거 구입을 위해 돈을 벌고자 나선다. 이 와중에 학교에서는 꾸란 제대로 읽기 대회가 열리고, 그 대회 상금은 갖고 싶던 자전거의 가격과 얼추 비슷했다. 매일 차도르를 제대로 하고 다니지 않아 혼나던 와즈다는 급 모범생으로 돌변, 꾸란 읽기를 공부하며 자전거를 살 그 날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리고 이건 한국이든 사우디 아라비아든 똑같은 게 왜 남자 애들은 좋아하는 여자애를 괴롭히는 걸까? 사실 압둘라 새끼는 와즈다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압둘라는 와즈다에게 자전거를 빌려주고 가르쳐주기도 한다. 두 사람은 점점 더 가까워진다.


이 가운데 엄마의 불임 때문에 아빠의 가족들은 아빠에게 두 번째 결혼을 하라고 시킨다. 아들을 얻기 위해서는 어쩌고 저쩌고... 엄마는 긴 머리를 좋아하는 아빠 때문에 머리를 길게 길렀고, 엄마가 다른 남자들과 일하는 걸 싫어하는 아빠 때문에 먼 거리까지 가서 여자들하고만 일을 해야 했지만 결국 아빠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한다. 와즈다에게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한 채로.


와즈다는 쿠란 제대로 읽기 대회에서 1등을 하지만, 1등 상금으로 뭘 하고 싶냐는 질문에 너무나 당당하게 "자전거를 살 것"이라고 답해 상금을 사실상 몰수당한다. 여자는 자전거를 타면 안 돼! 교장선생님의 말에 와즈다의 꿈은 무너진다. 교장선생님은 와즈다에게 이 돈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형제들에게 기부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사실상 통보)했고, 와즈다는 울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이때 만난 압둘라 새끼는 와즈다에게 자신의 자전거를 가지라고 하면서 나중에 크면 결혼하자고 대뜸 청혼을 한다. 좀 귀여움.


어쨌든 엄마는 마지막 장면에서 긴 머리를 자른 채 아빠의 결혼식을 지켜보며, 와즈다가 갖고 싶어했던 초록색 자전거를 선물한다. 엄마는 그렇게 말하며 와즈다에게 "이제는 우리 둘 뿐"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후 와즈다는 자유롭게 자전거를 타고 동네를 열심히 달린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원래 와즈다의 엄마를 죽일까, 라고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희망을 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엄마를 죽이지 않았다고 했다. 사우디 여성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 이 영화의 목표였기 때문에, 결국 영화는 자신의 페달을 힘차게 밟는 와즈다의 모습으로 끝난다.


이 영화가 개봉한 이후 사우디 아라비아의 여성들은 실제로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됐다. 영화 한 편이 정말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바꾼 것이다.


이 영화가 바꿔놓은 것은 또 있다. 사우디 아라비아 여성들에 대한 나의 편협한 시각. 나는 사우디 아라비아 여성들이 못 배워서, 너무 억압받아서, 노예인 줄도 모르는 노예들이라고, 불쌍하고 안 된 여자들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아 역시 저기도 사람 사는 세상이고, 그들도 기쁨과 분노와 억압 등 모든 감정들을 느낀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리고 사우디 아라비아에도 와즈다같은 여자들이 충분히 있을 것이라는 것도. 미약하게나마 시작된 변화가 돌풍을 불러오길 바라 본다. 당장은 어렵겠지만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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