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발 여행자를 제한하는 국가가 전 세계 174개국이 됐다.
한국발 여행자를 제한하는 국가가 전 세계 174개국이 됐다나 뭐라나? 정식적으로 막진 않았어도 항공편이 끊어져버린 지역도 꽤 된다고 하니 일년 중 휴가만 바라보고 사는 직장인들에게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해외는 커녕 회사도 못 가고 집에 갇혀 매일매일 ‘확찐판정’을 받고 있는 요즘이다.
며칠 전, 요즘같은 시국에 동남아 여행 싯가(?)가 나오기는 하나 싶어서 4월 초로 날짜를 잡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4박을 검색해보았다. 숙소는 페트로나스 트윈타워 풍경을 객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그 좋다는 M모 호텔을 선택 후 조식도 포함한 검색 결과, 가격은 충격적. 얼마게? 바로 1인 35만원. 앗! 말레이시아 일본보다 싸다!
그때까지 말레이시아 정부는 대구·경북 방문자가 아닌 한 한국발 입국자를 막지 않고 있던 바, 4일 밤을 페트로나스 트윈타워를 창밖에 두고 35만원이라니! 솔직히 조금 혹하긴 했다.
그리고 검색한 지 정확히 24시간 뒤 말레이시아는 한국발 여행자에 대해 입국금지 조치를 내렸다.
요즘 같은 때 코스모폴리탄 세계시민으로서 그런 고민을 했다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레이시아 외교부에서 각성시켜 준 듯하다.
해외에 나갈 수도 없고 고작 집밖에 나가더라도 얼굴을 마스크로 가려야 하는 나날들이다. 집에 갇혀 페트로나스 트윈타워가 저 멀리 보이는 곳에 방문해 자유와 자본에 대해 고찰했던 때를 회상해 보았다. 왜 이런 걸 ‘신혼일기’에 쓰냐고 물으시냐면, 집에만 갇혀 있어서 쓸 게 없어서다. 신랑은 계속 리모컨, 휴지, 충전기 같은 것들이 어디 있냐고 묻기만 하고...
때는 귀국을 12시간 정도 남겨둔 오후 12시. 호텔 체크아웃을 마친 나와 신랑은 부킷빈탕 최고 규모 쇼핑몰인 파빌리온 안의 한 카페에서 지도를 보며 마지막 일정을 짜고 있었다.
말레이시아는 무슬림들이 가장 많이 여행오는 관광국가로, 여기저기서 눈을 제외한 온 몸을 검은 차도르로 감싼 채 편한 복장의 남성과 함께 걷는 무슬림 여성들을 볼 수 있다. 그 정도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여성들은 히잡을 둘러 머리 정도는 감싸거나, 얼굴만 드러내놓고 있거나 했다. 친절한 그랩 운전수의 설명에 따르면 눈만 내놓은 경우는 거의 90%가 사우디라고.
눈만 내놓은 여성들은 음식을 그 천쪼가리 아래로 조심스럽게 먹었는데, 참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만 계속 들었다. 게다가 말레이시아는 1년 내내 덥고 습한 여름의 나라. 이 무더위 속에서 저렇게 천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다니... 안타깝기도 하고, 안됐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한 그런 마음이었다.
마지막 일정을 짜던 중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한테 남은 현찰이 얼마 없었던 것이다. 남은 시간 동안 밥을 먹고 공항까지 그랩을 타고 갈 돈 정도는 있어야 했다. 지갑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5만원권이 두 장 들어 있었다. 환율이 달러만큼 좋지는 않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고, 우리는 카페를 나와 쇼핑몰 안의 환전소로 향했다.
우리 앞에 차도르를 두르고 눈만 내놓은 여성과 웬 추리닝 쪼가리만 걸친 남자가 서 있었다. 패션으로 미뤄보아 사우디 출신. 근데... 환전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슨 서류도 작성하고, 남자는 싸인도 수차례 했다. 나는 신랑에게 속닥댔다.
″오빠. 이거 환전하는 거 엄청 복잡한가본데?”
″그러게. 공항에서는 금방 됐는데.”
영겁의 기다림 끝에 그 커플은 봉투 한 장에 다 들어가지도 않을 정도로 두툼한 양의 지폐를 받아들었다. 흡사 그 두께는 대학 때 썼던 ‘맨큐의 경제학’ 수준. 그들은 그 자리에서 여유롭게 이를 여러 묶음으로 나눠 봉투에 나눠 담고 자리를 떴다. 환전 직원은 친절하게 그들을 보냈다.
새삼 다시 보니 추리닝 차림의 남자는 정말 모자부터 신발까지 죄다 명품이었다. 알통이 커다란 시계는 뭐 말할 것도 없었다. 여자의 가방과 시계도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잡지 화보에나 나올 법한 명품 브랜드 제품이었다. 아마 저 차도르 안에 입은 옷도 죄다 명품일 터였다.
몸에만 2000만원 정도쯤 걸친 그들은 그렇게 자리를 떴고, 드디어 우리가 환전할 차례가 왔다. 우리는 사임당 선생님 한 장을 내밀었다. 여러 질문과 서류 작성을 각오한 채...
환전 직원은 사임당 선생님을 받아들더니 잠시 겹쳐져 있는 것이 있나 만져보곤 불쾌하다는 듯 우리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온리 디스?”
환전은 놀랄 만큼 빠르게 이뤄졌다. 직원은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거의 던지다시피 돈을 내밀었으며, 우리는 5만원 어치의 말레이시아 돈을 받아들고 만져봤다. 두께는 몇 미리도 안 됐다.
그 돈을 지갑에 넣으면서, 어쩌면 저 사우디 아라비아 사람들은 우리의 자유가 전혀 부럽지 않고 오히려 우스워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 정도의 자본이라면 자유가 그닥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땅 파면 돈이 나오냐?”라는 말은 그 누가 자유롭게 땅을 파도 아무것도 안 나오는 척박한 나의 마덜랜드에서나 먹히는 말이지, 국영석유기업만이 땅을 팔 수 있는 기름국에서는 ‘믿거나 말거나’ 같은 이야기인 것이다.
땅을 파낼 수 있는 자유와 두툼한 지폐의 자본을 둘 다 가지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전 인류가 그 두 가지를 한 번에 누릴 수는 없다면, 그럼 70억명 중 적어도 나만이라도 그걸 누릴 순 없을까? 제발...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이시여,,,
그렇다. 원래는 자본만 없었지만 지금은 자유조차 없기 때문에 이런 허망한 회상이나 하고 있는 것이다. 해외 여행도 못 가고 마스크로 매일 얼굴도 가려야 하다니. 이렇게 결국 한국은 사우디와는 달리 남녀 평등하게 외출시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는 게 길이길이 고유의 문화로 정착되어 버리면 어쩌지...?
물론 그 전에 빨리 코로나19가 썩 꺼졌으면 좋겠다는 입장이다. 당분간 우리 대부분에겐 자본은 물론 자유도 없을 예정이다.
김현유 에디터: hyunyu.kim@huffpost.kr
* 이 글은 허프포스트에 게재됐습니다.